마태복음은 잘 알려진대로
믿음을 강조하는 바울에 신학에 대한 일종의 반작용으로
행함을 강조하는 초기 기독교 신학의 한 주류를 보여 주는 복음서이다.
마태복음은 말씀을 주시고 올바르게 가르쳐 주시는 예수님, 특히 교사로서의 예수님에 대해서 강조하는데,
5-7장에 모아서 전해주는 예수님의 가르침인 산상수훈이 그 정점이다.
마태는 또한 듣고 배운 말씀을 삶에서 행동으로 옮겨야 하는 신앙인(교회)들의 태도를 무척이나 강조한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단언하는 야고보서와 같이
마태도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이 반석위에 집(믿음의 삶)을 세우는 것이라고 단언하고 있다.
이러다보니 어쩔수없이 마태복음의 말씀은
넓은 의미에서 "순종하면 복을 받고, 불순종하면 저주를 받는다"는 신명기 학파의 흐름을 잇는다고 볼 수 있다.
팔복 말씀으로 알려진 마 5:3-11절에 나오는
심령의 가난, 애통함, 온유, 의에 주리고 목마름, 자비, 청결, 화평케하는 자,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자.. 등의 조건들도
하나님께 속한 이들이 지녀야할 성품과 태도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일을 행하고, 이러한 존재가 되어 갈 때,
하나님 나라 소유, 위로 받음, 배부름, 자비를 받음, 땅을 받음, 하나님을 봄, 하나님의 자녀가 됨.. 등의
수혜자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들을 행하거나 그러한 존재가 되어 가다면,
하나님께서 주시려는 궁긍적인 신앙의 복들을 누릴 수 있다고 하는 넓은 의미에서의 신명기 사상에 속한다.
팔복 말씀 대부분은
하나님 편에 서서 하나님의 법과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삶이 복되다는 의미에서
가장 고차원적인 순종과 행동을 요구하는 명령법의 말씀이다.
그러나 동시에 사회 구조상 어쩔수없이 약자의 자리에 처한 이들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고난을 당하는 자들이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은총 안에 있음을 선포한다는 점에서는
하나님의 은총을 강조하는 직설법이기도 하다.
또한 팔복 말씀은
마태 당시 사회적 약자들이 주류가 된 교회에 주는 말씀이었을 터인데,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은총을 가르치는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전한 신앙인이 되어가도록 제시된 가장 이상적인 말씀(최고의 제자도)이라고 할 수 있다.
마태복음의 팔복은
누가복음 6:29-26절과 비교하면서 읽어 보면 유익하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것은 복받는 자는
가난한 자의 복, 주린 자의 복, 우는 자의 복, 박해받는 자가 받을 복이다.
마태에 나오는 온유한 자, 긍휼히 여기는 자, 청결한 자, 화평케 하는 자는 누가복음에 나오지 않고,
대신 누가복음은 네 가지 화를 선포하고 있는데,
부요한 자가 받을 화, 배부른 자가 받을 화, 웃는 자가 받을 화, 칭찬 듣는 자가 받을 화가 그것이다.
마태와 누가가 차이점은 있으나
그들이 기록한 "복받을 자들"에 대한 말씀이 공통점이 많은 관계로
학자들은 이 말씀에 대한 원본이 있었을 것으로 본다.
그리고 누가복음이 원본 말씀에 더 가까웠을 것으로 보는데,
이유는 누가는 현재의 삶에서 보이는 직접적인 삶의 현실을 말하고 있는데 반해
마태는 "심령이, 마음이, 의에.."라는 단어를 첨가함으로 도덕적이고 영적인 영역으로 이 말씀을 확대했기 때문이다.
마태가 이렇게 한 것은 그가 속했던 교회의 상황을 반영한 해석으로 볼 수 있다.
두번째 묵상
본문 5:13-48절 말씀인 마태의 산상수훈은
구원을 받기 위한 조건으로서 의로움, 즉 자격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공동체인 교회와 그 구성원들이 행해야 할 가르침이다.
즉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들이 지니는 자녀다움이 무엇인지,
세상, 특히 유대교인들과 달라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본문이다.
5장 13-48절을 해석할 때
본문에 주어진 말씀들이 지키기 어려운 것이라는 이유로
인간의 유한성을 자각시켜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이 필요하다는 형식의 해석은 지양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 말씀은 구원론과 관계되기보다는
이미 구원받은 공동체인 교회와 그 구성원의 존재 이유와 행동지침이기 때문이다.
마태는 유대교와 분리된 신생 기독교,
즉 바울의 이신칭의로 구원받은 공동체에게
"그러면 어떻게 사는 것이 기독교인다움인가?" 라는 것을 예수님의 가르침을 모아서 전해주고 있다.
예수님은 새로운 율법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모세의 율법을 해석해온 유대교의 해석을 넘어
교회 공동체에 맞게 갱신시켜 주시는 새로운 율법 해석자이자,
교회가 지녀야 할 새로운 메시아적인 행동 지침을 수여해 주시는 분이다.
"너희는 이렇게 들었으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고 하시면서
문자 중심의 율법 해석에서 그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본래적인 의도를 되살리시는 해석을 하셨다.
물론 예수님 당시에 유대교의 서기관과 랍비들도 모세의 율법을 문자적으로만 해석한 것은 아니다.
그들도 율법의 문자적인 의미뿐 아니라, 본래적인 의미를 해석해 왔다.
미쉬나 4부 아홉번째 책인 "피르케이 아보트(פרקי אבות)",
즉 선조들의 윤리학으로 불리는 책만 봐도 유대인들이 모세의 율법을 얼마나 폭넓게 해석해 왔는지 알 수 있다.
아래와 같은 말들이 선조들의 윤리학에 포함된 해석 중 하나이다.
“너희 집을 활짝 열라. 가난한 자를 네 식구로 삼으라(1:5).”
이들의 율법 해석과 예수님의 해석에는 차이점도 있고 유사한 점도 있으나,
중요한 것은 예수님은 율법을 재해석하셔서 그의 교회에 속한 자녀들이 살고 행해야 할 지침으로 주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말씀들을 통해
교회가 유대교와 달라야 하는 점들에 대해서 가르치셨는데,
그것은 문자나 형식을 너머 본래의 의미,
즉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에게 기대하시는 구별된 삶을 모습을 가르치신 것이다.
본문 말씀을 통해 제시되는 기독 신앙인들의 기준, 하나님의 자녀로 인침받은 이들의 삶의 기준은
1)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의보다 더 의로워야 한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어찌되었건 유대교가 지향하는 율법 준수의 최고수자들이다.
예수님은 그의 백성들이 이들보다 더 의로운 존재들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문자적인 의미에서 최고수자라면,
그리스도인들은 문자적인 의미를 포함함과 동시에 넘어 본래적인 의미를 살아내는 존재가 되라는 것이다.
2) 세리와 바리새인과는 완전히 구별되어야 한다.
죄인의 대표자인 세리와 율법을 모르는 이방인들도 자기와 관계된 것들을 아끼고 보호한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해 관계로 얽힌 것들은 물론,
미워하는 자들, 박해하는 자들, 심지어 관련이 없는 자들마저도 사랑하고 포용하는 존재가 되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삶의 방식이 '선한 자나 악한 자나 차별없이 비와 해를 주시는" 하나님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신앙인은 세상의 법칙(개인의 탐욕)에 속해는 있으나, 하나님의 법칙을 따르는 존재이다.
기독교인으로 산다는 것은 다른 삶의 기준을 가진다는 것인데,
그 다른 기준은 다름아닌 하나님이 세상을 보시고 대하시는 기준이다.
이 기준이 교회의 기준이고 신앙인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완전하신 하나님의 성품과 속성을 공유한 존재들이다.
거듭났으며, 구원을 받은 새로운 존재의 기준과 시각과 태도로 살아야 한다.
이렇게 사는 삶이 소금과 빛된 삶이고,
실체로 초대 교회의 구성원들은 이런 삶을 살아 냈다.
적대감 또는 살의보다는 포용과 이해의 마음으로 사람을 대할 수 있다면,
탐욕의 이용 대상이 아니라 더불어 하나님 나라를 이룰 대상으로 이성을 대할 수 있다면,
하나님을 내 사리사욕을 위한 일에 일절 이용하지 않을 수 있다면,
악해져 가는 세상을 품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은총으로 사는 다른 삶의 모습을 보여 줄 수 있다면,
소금과 빛처럼 살라 하신 예수님의 가르침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서는 것이 아닐까?
"하나님이 주신 은총으로
하나님의 완전하신 속성과 성품이 나와 교회를 통해 세상에 실현되기를...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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