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3장은 하나님께서 불완전한 인간을 어떻게 대하시는가 하는 성찰을 보여주는 이야기로 볼 수 있습니다.
선악과 이야기가 아니라도,
사람은 호기심에 의해서든 욕망에 의해서든 실수를 하고,
죄를 짓고, 넘어설 수 없는 것을 탐하는 그런 불완전한 존재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불안전한 존재로 스스로의 한계를 알면서도,
그 한계에 머무르지 못하는 이중성의 욕망을 지니고 있는데,
이것이 대한 적절할 표현을 한 이가 바울이다.
-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롬 7:21-25)
하나님을 따르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는 있으나,
실상은 자기 자신의 호기심과 욕망을 따를 수 밖에 없는 인간 존재에 대해 잘 설명하고 있다.
아담과 하와도 하나님께서 금지하신 명령과 결과를 잘 알지만,
그 명령을 따를 믿음보다 그것이 줄 환상과 유혹을 더 쉽게 따르는 존재였다.
그래서 그들은 뱀의 유혹을 기다렸다는듯이 유혹에 넘어간 것이다.
처음 사람들은 유혹에 넘어 갔을 뿐 아니라,
자신들이 그렇게 한 이유를 타인에게로 돌리는 자기 합리화의 모습도 보여 주는데,
이것 또한 사람의 근본 상태를 반영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사람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명령을 지킬수 없는 존재였다.
그것도 혼자로 되는 세상이 아니라,
가정을 이루고 사회를 이루면서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타인들과의 공동체에서는 더욱 그렇다.
오늘 말씀을 보면
사람의 욕망을 잘 아는 유혹자의 유혹을 받은 여자가 먼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먹었고,
먼저 먹은 그가 또 다른 유혹자가 되어 남편에게 주어 먹게 했다.
이렇듯이 자의든 타의든 인간은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기 보다는 범하는데 우월한 존재이다.
하나님은 서로를 돕는 존재로서 사람을 만드셨지만,
사람은 서로를 도울 때도 있지만,
하나님을 등지고 욕망을 따르도록 서로를 유혹하는 일에 더 능한 존재가 사람이다.
결국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후,
자신들의 처지를 깨달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피하여 숨어 버렸다.
오늘 말씀은 죄를 범하고 숨어 버리는 사람을 찾아 오신
하나님께서 잘못한 사람에 대해 어떻게 대응하시는가를 보여 준다.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께서 스스로 하신 말씀을 번복하고 계시다는 것인데,
2장에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지만, 선악과를 먹었지만 죽음의 형벌은 내리지 않으셨다.
다만 하나님께서 자신의 법을 어긴 존재들에게 주신 것은
그 법을 어김으로 해서 새로 주어진 환경에 대해 선고를 하시듯 설명을 하신 것 뿐이다.
여자에게는 원래 해야하는 임신과 출산에 고통을 더하셨다는 말씀과
남편에게 종속되는 것을 선고하셨고,
남자에게는 불순종의 댓가로 저주를 받은 그 땅에서 먹을 거리를 얻기 위해 땀을 흘려 노동을 하고,
그런 삶을 산 후에 흙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선고하셨다.
이 말씀에서 오늘 보편적인 삶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있다.
그 후에 하나님께서는 유혹자로 등장한 뱀에게는
풀 대신에 흙을 먹을 것과 배로 다니는 형벌을 주셨다.
그리고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 사이에서 일어날 일에 대해 말씀을 하셨는데,
여기에서 알수 있는 것은 유혹자는 단순히 동물 뱀이 아니라 영적인 어떤 존재임을 암시한다는 점이다.
즉 하나님을 대적한 어둠의 존재인 대적자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 사이에서 일어날 사건을 예언하는 것인데,
이 이야기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예언하고 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즉 뱀의 후손이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무는 것은
세상 어둠의 영이 최고의 권세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하는 것이나,
여자의 후손이 뱀의 후손의 머리를 치는 것은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 어둠의 영의 마지막 권세인 죽음도 무력화하신 것으러..
그래서 바울도 예수님의 부활과 우리의 부활을 이야기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고전 15:51-54)
사망의 권세를 잡은 자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함으로서 승리한 둣이 보였으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 사망마저 삼켜버리심으로 이 땅에 사망에 대한 두려움과 권세를 폐하시고,
부활의 소망을 주셨다는 것을 바울이 선포하는 것이다.
창 3:15절이 이 예언의 말씀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최고의 피조물인 사람을 대하시는 마음을 알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잘 아셨다.
명령을 지킬 수 없을 뿐 아니라, 대적자의 유혹에 늘 넘어가는 존재임을 말이다.
그래서 이미 창조의 순간부터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처음부터 자신에게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사람을 위한 대속의 길을 예비하고 계셨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예언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사람을 멸망시키려는 분이 아니라,
구원하시려는 분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벌 주시거나 징계하시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사람을 보호하시고 돕는 분이다.
“정녕 죽으리라”는 말씀도 스스로 거두어 들이신 하나님은
스스로 인간으로 오셔서 인간을 위해 대속의 희생 제물이 되시는 길을 이 말씀을 통해 예언해 두신 것이다.
그리고 창 3장의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는 또 하나의 구절이 3:21절이다.
하나님께서는 에덴 동산에서 살 자격을 스스로 걷어차 버린 인간을 내보내시면서,
그들이 자신을 보호하려고 해 입은 나뭇잎으로 된 옷 대신에 짐승의 가죽으로 된 옷을 해 입히셨다.
하나님은 자신들의 잘못으로 인해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야 할 사람을 끝까지 보호하시고 배려하시는 존재임을 보여 준다.
아버지가 자녀를 아끼고 보호하듯이, 자신을 등진 사람들을 돌보시고 배려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창세기 3장은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김으로 하나님이 주신 에덴 동산을 잃어 버린 실낙원의 이야기이지만,
동시에 실낙원을 자초한 인간을 끝까지 보호하시고 배려하시며 지켜 주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을 보여주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 범죄함으로 에덴동산에서 추방되는 이야기를 전하는 창세기 3장은
피흘림의 번제로 구원의 길을 여신 구약시대의 구원의 길과
예수님의 대속을 통해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신약시대를 위한 구원의 길이 동시에 예언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기에게 잘못한 형제를 몇 번을 용서해야 되는지를 묻는 베드로의 질문에
예수님은 일곱번씩 일흔번을 용서하라고 하셨다(마 18:22).
창세기 3장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예수님께서 하신 이 말씀이
하나님이 사람을 향해 가지신 근본적인 마음이 아닐까하고 생각하게 된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하나님)의 마음이니..”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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