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C 302-200년
유대인들의 상황
프톨레미 왕조 시절에 유대인들의 상황에 대한 기록도 거의 없는 편이다.
다만 이 시기에 유대 땅은 부유하고 안정된 프톨레마 왕조의 일원이 되어
평화로운 1세기를 보낼 수 있게 되었다.
프톨레미 왕조에서 파견한 총독 행정관이 정치와 군사 행정을 담당한 반면에,
유대인들이 중요시 여기는 성전 제의와 율법을 중심으로 하는 생활은
대제사장과 유대 평의회(게르시아)를 중심으로 일종의 자치를 누리던 시기였다.
프톨레미 왕조가 유대 땅을 다스리던 당시 유대 사회의 실질적인 영향력을 발휘한
대제사장은 다음과 같다.
이 당시 유대인의 제사장 총수는 1500명 정도 되었다고 한다.
대제사장 히스기야는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애굽으로 이주했고,
그를 이어서 엘르아살이 대제사장으로 있었으며,
므낫세 대제사장을 거쳐, 제논의 기록에 나오는 오니아스 대제사장과
그를 이은 시몬 2세 대제사장이 이 당시 유대 사회의 실질적인 지도자들이었다.
프톨레미 왕조의 유대 통치
프톨레미 왕조는
유대 지역과 그 주변 지역을 행정 구역 단위로 나누어 휘파르키엔이라고 불렀으며,
그 지역을 다스리던 행정관을 휘파르코스라고 불렀다.
그리고 오이코노머스라는 재정가와 함께 그 지역의 행정과 세금을 담당하개 했다.
그러나 종교 영역에서만큼은
이들이 아닌 대제사장과 산헤드린으로 발전한 유대 평의회에서 주관하도록 하였다.
프톨레미 왕조는 알렉산드리아를 헬라 문화의 중심지로 만들었는데,
그 대표적인 건물이 알렉산드리아 대도서관을 포함한 일종의 학술기관인 무세이온이다.
이곳에서 학자들이 모여 문헌학, 물리학, 천문학 등을 연구했다.
무세이온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인 데메트리우스에게서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훗날 당시에 가장 많은 도서를 소유한 알렉산드리아 대도서관으로 발전했다.
제논 파피루스B.C 259는
프톨레미 2세의 재무 장관인 아폴로니우스의 대리인으로 일했던
제논이 유대와 요르단과 시리아 지역을 1년 간 여행하면서 남긴 일종의 여행기이자 상업 기록이다.
이 기록을 보면 당시 유대 사회에서 영향력을 끼치고 있던 한 인물이 소개되는데,
그는 요단강 건너편의 한 군사 식민지의 책임자였던 토비아스이다.
그는 프톨레미 왕조로부터 세금징수권을 받아 내었고,
이것을 통하여 가문의 부를 축적하여 큰 영향력을 끼친 인물로 소개되고 있다.
반면 이당시 유대 사회의 대제사장이었던 이는 오니아스였는데,
오니아스는 프톨레미 왕조보다는 북쪽에서 세력을 넓히고 있던 프톨레미 왕조에 더 가까운 인물로 소개된다.
이 당시 유대 사회는
유대 땅을 두고 소유권을 주장하고 있던 프톨레미 왕조와 셀류커스 왕조파로 나뉘어 있었음을 알수 있다.
유대인들의 특징
이 시기 유대인들의 특징 중 하나는 디아스포라 유대 공동체가 확장되었다는 것이다.
페르시아의 중심지였던 바벨론에서의 유대인 디아스포라도 확장되었겠지만,
특히 프톨레미 왕조 시절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공동체는
상당히 큰 규묘로 세 개 이상의 회당을 가지고 있었고,
인구 분포는 알렉산드리아 인구의 1/4나 차지할 정도였다고 한다.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들은 아람어와 히브리어를 모르는 유대인들을 위해 헬라어로 성경을 번역했는데,
그 성경이 70인역으로 불리는 헬라어 구약성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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