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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큐티 교재(필사&정리)/마태복음

마 8장 - 치유 기적의 의미

산상수훈을 마치신 다음 산에서 내려 오신 후, 이어지는 마태복음의 예수님의 여정은 마가복음과 다르다.

마가복음에는 제자를 부르신 후,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셨고,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을 고치셨으며, 그후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고치셨고, 몰려든 사람을 치유하셨다. 그리고 다음날 새벽기도후에 전도여행을 하셨고, 그후에 나병환자를 고쳐 주신 것으로 나온다.

그러나 마태는 가장 먼저 나병환자를 고치신 이야기로 시작해서, 마가에는 기록이 없는 이방인 백부장의 종을 고치시는 이야기 다음에,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신 이야기를 전한다.

이로 보아 마태는 예수님의 치유 이야기를 일이 일어난 순서로 전해주기 보다는, 필요한 자료들을 자신의 목적에 맞게 선택해서 전해 주는 것으로 보인다.

 

가버나움에 있는 베드로의 집터 위에 세워진 수도원(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신 곳)

 


 

"여인이 일어나서 예수께 수종들더라."

8장 1-17절에 등장하는 치유 기적은 세 가지인데, 이 치유 기적의 특징은 그 대상들이 모두 유대인의 정결법을 지킬 수 없는 이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처음 고치신 나병환자 - 무가치한 존재로 인식되었으나 대담한 믿음을 지녔던 - 는 유대인 사회에서는 죄인의 대명사였고, 다음에 치유하신 더 대담한 믿음을 가진 백부장은 유대인들이 경멸했던 이방인이며, 열병으로 누워 있던 베드로의 장모는 여성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마태가 전해주는 예수님의 처음 치유 이야기는 이렇듯이 유대인 사회에서 비주류로 인식되던 이들이 예수님을 통해서 그들의 존재감과 권리를 회복하고 인정받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당시 정결법으로 구분 짓는 유대교와 시민과 노예로 구분되던 로마 사회에서 교회가 지니는 의미이기도 했다.

 

대담한 믿음을 지녔던 나병환자에게는 유대교의 정상적인 구성원으로 회복되는 율법을 행하도록 명하셨다. 이 절차를 통해 그는 정상적인 유대인의 일원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방인 백부장의 이야기를 통해서는백부장과 같은 믿음을 지닌 이방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퍼져나갈 이방인 선교를 암시하는 동시에 잘못된 선민의식으로 교만한 유대인들에게는 그들의 지위를 강탈당할 것이라는 경고의 의미를 동시에 전하고 있다.

 

그리고 사회적인 약자였던 베드로의 장모, 즉 여성을 치유하시는 이야기는 여성들도 예수님을 섬기는 자(제자)가 될 수 있다는 것과 교회를 섬기는 지도자들이 될 것임을 보여주는 것으로 여성들의 존재와 권리를 회복해 주시는 이야기이다.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를 고치신 후, "아무에게도 이 일을 이르지 말라"고 하셨는데, 그렇다고 이 일이 소문나지 않을 일은 아니였을 것이다.

이 말씀의 의미는 바리새인들이 귀신의 힘으로 사람을 고친다고 비난하는 것에 대한 반박으로 예수님은 치유 사건을 통해 사람을 모은다거나, 금전적인 이득을 취한다거나, 사람들로부터 영광을 얻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려주는 말씀이다.

예수님이 사람들을 고쳐주시는 것은 병으로 고생하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심이요. 병(육체적, 사회적 제약)으로 인해 펼치지 못하는 사람으로서 그들의 가능성을 펼칠 기회를 주시는 것이다.

그리고 치유 사건을 통해서 마태가 제시하는 것은 예수님은 당시의 일반적인 주술적인 치유가가 아니라, 사람 자체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점을 보여 주려는 것이다.

 


 

두번째 묵상

 

8장의 하반부인 18-34절에는 "너는 나를 따르라"는 제자도 말씀에 이어, 두 개의 기적, 풍랑 다스리는 기적과 귀신들린 자 두 사람을 고치시는 이야기를 전해 준다.

마태는 이 두 개의 기적 이야기 앞에, 제자도 말씀을 기록함으로서 이 기적을 통해 제자도에 대한 교훈을 전해주려는 듯 하다.

 


갈릴리 호수 동쪽이 있는 거라사 유적지 풍경 

 

"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따랐더니."

마태는 본문을 통해 예수님이 갈릴리 호수 서편(가버나움?)에서 배를 타시고, 갈릴리 호수를 지나 호수 동편 지역인 가다라(거라사?)로 가셔서 귀신 들린 자들을 치유하시고 돌아 오시는 여정을 보여 준다. 

초대 교회 시절 교부들은 이 본문에서, 갈릴리 호수는 세상이고, 배는 교회로 해석했다. 그리고 배에 탄 이들은 넓게는 성도들이며, 좁게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로 보았다. 그리고 배가 가는 길에 일어난 풍랑은 교회를 향한 세상의 박해와 질시와 배척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아버지의 장례를 치러야 하는 제자의 청을 거절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마태 당시 교회가 겪고 있는 박해의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예수님을 구주로 따르는 제자들이 기존 문화의 삶을 강요하는 가족과 사회로부터 받는 어려움을 암시하고 있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마태는 본문의 기적 이야기를 통해서 교회와 제자의 길을 방해하는 풍랑이 어떠할지라도 예수님은 그 풍랑을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신 분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고자 한다. 풍랑을 제어하시는 방법도 복잡하지 않고, 단순 명료하다.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여 지거늘.."

이어서 나오는 귀신들린 자를 고치시는 장면에서도 공관복음과 비교해 볼 때, 마태의 의도가 드러난다. 마태는 의도적으로 치유받은 사람의 상태나 그에게 주신 사명은 삭제하고 있으며, 단지 어둠의 세력인 귀신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이야기와 그들을 말씀 한마디로 제어하시고 통제하시는 예수님의 능력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풍랑이 이는 바다가 현실적인 사회에서 만나는 박해의 상황이라면, 귀신들린 자의 이야기는 영적인 세력과의 싸움에 대한 교훈인데, 이 싸움 역시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면 모든 것이 정리된다는 것을 보여 준다. 교회와 제자가 가는 길에 일어날 수 있는 사회적이고, 영적인 박해의 세력이 아무리 강할지라도 예수님은 그 어둠의 세력을 말씀 한마디로 제어하시는 신적인 능력을 가지신 분임을 보여 준다.  

귀신들린 자를 고치시면서 귀신들이 되재 떼어 들어가게 해 달라 한 것과 허락하셔서 돼지들이 죽은 것에 대해서는 해석이 쉽지 않다. 다만 이방인들과 돼지를 부정한 동물로 보는 유대교적인 관점이 투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일을 본 그 지역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귀신들린 자를 고쳐 주시고, 귀신들을 추방하셔서 그들에게 유익한 일이 일어 났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배척한다. 떠나 달라고 청했다. 제자들이 한 사회에 들어가 복음을 전하며 그 곳에 유익을 끼치더라도, 그 지역의 사회와 사람들이 무조건 환영하는 것이 아니다. 그 대신에 박해를 받고, 배척당할 확률이 더 높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의 길을 갈 수 있는 이유는 예수님이 스스로를 주셔서 우리를 구원하신 까닭이며,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나의 편이 되셔서 동행하시며 보호하여 주시기 때문이고, 복음을 전할 사명을 주셨기 떄문이다.

"너는 나를 따르라."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