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는 8장에서 치유과 기적 이야기를 통해 제자도 말씀과 교회를 방해하는 모든 세력을 이기시는 예수님의 능력을 보여주었다. 이제 마태는 행위 + 논쟁이라는 혼합 형식으로 된 말씀들을 통해 예수님이 원하시는 이 땅의 삶이 어떠한 것인지를 보여주려고 한다.
9장을 여는 이야기는 친구들에 의해 예수님께 들려 나온 한 중풍병자의 이야기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좀 이상한데, 그것은 중풍병을 고쳐주시는 것에 초점이 맞춰진 것이 아니라, 이 중풍병자가 죄사함을 받는 다는 것이 초점이라는 것이다. 본문은 이 사람이 세리였다든지, 죄인이었다든지, 아니면 그가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었다든지 아무런 설명을 해 주지 않는다. 다만 그가 회개하기도 전에, 그가 죄사함을 청하기도 전에 예수님께서는 그가 죄사함을 받았다고 선포하셨다.
그래서 당황한 주변 사람들 중 율법을 아는 서기관이 이런 반응을 보인 것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이 사람이 신성을 모독하는구나.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 괄호 부분은 마가복음 2:7절). 그러나 예수님은 거침이 없다. 중풍병자의 죄를 사해 주실 뿐 아니라, 그의 병도 고쳐 주셨다.
예수님 당시에 일반적으로 죄사함을 받는 방법은 성전에서 드리는 피의 제사였다. 물론 이 제사가 오염되었다고 생각해서 물로 몸을 씻는 엣세네파와 세례를 통해 죄사함을 얻는다고 선포한 세례 요한의 세례 의식 등이 있었지만, 그래도 죄사함의 중심에서 대속의 제사가 있었고, 삶에서 죄사함을 인식하면서 용서받는 삶의 보다 나은 확신으로 금식 등의 고행을 하는 것이 일반적인 종교 문화였다.
이런 스스로의 정결을 위해 대속의 제사를 드리고, 금식을 하는 개인적인 종교 행위 외에, 하나님께 더 거룩해지기 위해 당시의 종교인들은 여러가지 정결 규범들을 만들어 지키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정결법을 준수하는 사람들과 준수할 수 없는 사람들을 구분하는 사회 문화가 형성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 두 그룹 사이에는 서로를 구별하고, 그리고 상대를 차별하며 멸시하는 문화를 만들어 내었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이런 상황속에서 예수님께서 아무런 조건(제사, 금식 등의) 말씀으로 죄사함을 선포하셨을 뿐 아니라, 당시의 유대교의 종교인들이 상종하지도 않던 세리와 죄인들과도 아무런 차별도 없이 기꺼이 어울리셨다. 이것은 당시 의로운 종교인들을 놀라게 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 분노를 불러오는 일이었다. 당시의 종교인들과는 구별되지만 성전 제사외에는 유대교의 전통에 익숙했던 세례 요한의 제자들도 "왜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는냐?'는 질문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의 질문에 예수님은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대하는 생각이 당시의 종교관들과는 완전히 다르셨다. 당시의 유대교 종교인들은 하나님을 공의와 심판하시는 엄하신 분으로 여겼다면(마 3:7-12절에 기록된 세례 요한의 설교를 보면 당시의 하나님 이해를 알 수있다.), 예수님은 하나님은 선한 자나 악한 자 모두에게 자비하신 분으로 이해하셨다. 예수님이 알려 주신 하나님은 사람을 정죄하기 보다는 용서하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이시며, 구별하시기보다는 포용하시는 분이시며, 서로의 장벽을 높이기보다는 스스럼없이 어울리기를 원하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기존의 유대교가 구분하고, 정죄하고, 억압하는 문화였다면, 예수님이 일러 주신 하나님 나라는 포용하고, 용서하고, 풀어주고, 격려하는 문화였다. 중풍병으로 표현된 고통을 당하던 병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온 친구들의 믿음(고난당하는 이들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을 보시고 병자를 용서하셨던 것처럼, 예수님은 자비하신 하나님을 닮아 서로에게 자비를 베풀고 돕는 세상을 원하셨다.
구별하고, 정죄하고, 억압하는 문화는 낡은 부대이고, 낡은 천이다. 반면에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따라 서로에게 자비하고, 용서하고, 관용을 베풀며, 벽을 허물고, 서로를 격려하는 문화는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문화이다. 이것은 예수님이 세상에 부어 주시는 새로운 포도주(예수님의 가르침과 성령의 역사)이다. 새로운 포도주는 새로운 부대에 담아야 한다. 낡은 부대 - 구별, 차별의 옛 종교 - 담을 수는 없다.
새로운 종교 포도주(예수님의 새로운 가르침과 성령의 역사)가 담기는 부대는 교회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구별하고, 정죄하고, 문을 닫는 폐쇄적인 공동체라기보다는, 포용하고, 용서하며, 개방하는 공동체이어야 한다.
두번째 묵상
마 9장 하반부 18-34절은
세 개의 치유 기적 이야기를 전해 주는데,
실제로 치유 받은 사람은 5명이고, 치유받은 병 종류는 여섯가지이다.
그 이유는 본문의 세 개의 치유가 모두 이중적인 치유를 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관리의 딸을 살리시는 이야기는 열 두해를 혈루증으로 고생했던 여인의 이야기가 함께 나오고,
맹인은 두 사람이 치유를 받으며,
마지막에 치유 받은 사람은 두 형태의 병을 가진 존재였다.
그리고 이 치유 사건은 마 11:5절에 기록된대로
맹인이 보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는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고 있음을 보여주며,
이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을 통해 실현된 것을 말해 준다.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는 길은
오늘 본문이 보여준 대로 치유의 기적을 경험한 이들처럼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는 것이다.
죽은 딸을 살려 달라는 관리는
"오셔서 손을 얹어 주시면, 죽은 딸이 살아 날 것"을 믿었고,
여성인데다가 병으로 시달린 오랜 새월로 인해 소심해졌을 혈루증 여인은
비록 그녀가 몰래 예수님의 겉옷을 만졌지만, 그것은 그녀가 보인 최고의 믿음 고백인 동시에 행위였다.
그리고 보이지도 않는 눈으로 예수님을 따라 집까지 들어온 두 맹인은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는냐"고 물으시는 예수님께 확신에 찬 믿음을 고백했다.
마지막 치유 사건에서는 치유받은 본인의 반응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그 일을 통해 믿음을 고백하는 무리들을 보여 주고 있다.
이렇듯이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고, 그 나라에서 일어나는 일을 경험하는 조건은
예수님께서 그 일을 행하실 수 있다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는 것이다.
그리고 9장 35-38절은
마 4장의 시험 이야기 다음부터 진행된 첫 번째 큰 이야기를 끝맺는 동시에,
(마 4:23절과 동일하게 "회당 가르침, 복음 선포, 병자와 귀신들린 자 치유" 형식으로 마무리함)
10장부터 시작되는 선교 파송과 제자도 이야기를 미리 보여주는 것으로 마무리하고 있다.
(목자없이 유리하는 양과 같은 무리들을 위해 추수할 일꾼을 보내달라고 기도를 명하심으로..)
마태는 관리의 딸과 혈루증 여인을 치유하는 이야기를
마가복음의 이야기 틀을 그대로 가져다가 쓴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마태는 마가가 23절에 걸쳐 기록한 긴 이야기를
단지 9절의 이야기로 줄여서 전해 주는데,
마태가 줄인 이야기는 대부분 예수님의 인성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것들이다.
마가에서는 소녀가 죽어가는 것으로 나오지만,
마태는 소녀가 이미 죽은 것으로 전해주고,
마가는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고 물으시는 모습을 보이지만,
마태는 이 말을 삭제하고 여인에게 곧바로 구원을 선포하셨다.
"달리다굼"이라고 말씀하시며 살리는 대신에, 손만 잡으신 것으로 기록했고,
살아난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한 마가의 기록도 마태에는 없다.
마태는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신적 권위를 강조하기 위해 인간적인 모습을 보이는 부분을 대부분 삭제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이 같은 이야기를 전해주는 공관복음을 함께 읽어 보면,
복음서를 기록한 저자들이 이야기를 통해 전해주고자 했던 의미와 교훈의 성격을 파악할 수 있다.
시력을 회복한 두 맹인의 이야기는
예수님을 통해 믿음의 시력을 회복할 때,
비로소 예수님이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메시야로 보인다는 것을 보여 준다.
마지막 치유 사건에서 믿음의 눈이 열린 이들은 예수님이 행하시는 기적에 가슴으로 반응하지만,
여전히 닫힌 눈을 가진 이들은
예수님이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귀신의 탓으로 돌리면서 비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열린 믿음의 눈을 가진 이들은 삶에서 숱한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하지만,
닫힌 믿음의 눈은 하나님의 은총과 하나님의 역사를 보지 못하고 비난하기에 바쁜 존재들이다.
거룩한 것을 개가 알아 볼 수 없고,
돼지가 진주를 알아 보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
이 소리를 들은 여인의 심정이 어땠을까?
9장의 이야기에는
당시 노예들보다 조금 나은 대접을 받는 여인들이 치유받는 특별한 이야기가 나온다.
당시에 부정한 자의 대명사였던 나병환자도 남자였기에 예수님께 바로 나올 수 있었지만,
본문의 여인들은 예수님께 당당하게 나올 수도 없는 존재들이었다.
한 명은 남자인 아버지가 대신해서 나왔고(물론 움직일 수 없는 형편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 명은 몰래 와서 살짝 만질 정도로 소극적인 모습을 보일 수 밖에 없었다.
아마도 혈루증으로 부정한 그녀를 데려가줄 남성(아버지, 남편, 자식)이 없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찾아 오지 못하는 소녀를 찾아 가셔서 살려 주셨고,
숨어서 나올 수 밖에 없었지만, 몰래 와서 옷자락을 만진 여인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 주셨다.
"딸아,. 안심하라..."
그리고 어렵게 찾아온 그 여인을 고치셨을뿐 아니라,
그녀의 믿음을 칭찬하시면서 구원받았다는 사실도 선포하셨다.
예수님도 크게 기뻐하셨을 것이다.
12년 혈루증을 치유 받은 여인이 진정 행복한 것은
평생 기억하며 살아갈 예수님의 말씀과 형용할 수 없는 선하신 눈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이 여인들이
누가복음 8:1-3에 나오는 대로
자기들의 소유로 평생 예수님을 섬기는 존재가 되었을 것이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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