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27장은 읽고 나면 기분이 유쾌해지는 본문은 아니다.
믿음이 좋은 아버지 이삭이 눈이 안보이게 되고, 죽을 때가 되어(?), 장남에게 축복을 하려고(유산을 물려주려고?) 준비를 시켰다. 사회적인 관습을 따라 불변의 권리인 장남으로 태어난 에서는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여 축복을 받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끼어드는 자인 야곱이 어머니와 함께 이삭과 에서의 장자의 축제에 끼어들어 본때나는 장자의 축복식을 완전히 망쳐 버렸다. 어머니 리브가의 각본을 따라 차남 야곱이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아버지 이삭을 속여 장자의 축복을 가로채 버린 것이다.
야곱이 장자의 축복을 가로챈 후 돌아온 에서는 울며 통곡하지만 이 일을 돌이킬 방법을 찾지 못했고, 아버지 이삭은 황당해하지만 그에게도 한번 내린 축복을 회수할 수 없었다.
잘 아는 대로 이 일로 믿음의 조상의 자녀인 아브라함 가문에 큰 갈등을 가져오게 된다. 억울한 에서가 동생을 죽이겠다는 마음을 품게 되었고, 이 일 때문에 야곱은 집을 떠나 외갓집으로 피신할 수 밖에 없었다.
창 27장의 일로 웃을 수 있는 자가 있었을까.
아버지의 권위가 무너져 버린 이삭, 장자의 축복을 빼앗기고 분노하는 에서, 형의 분노를 피해 살아 남아야 하는 야곱, 이 일을 꾸민 당사자인 리브가인들 웃을 수 있었을까?
왜 믿음 좋은 이삭의 집안에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하는 것일까? 순리대로 일이 진행되면 안되는 것이었을까? 믿음의 집안을 갈등속으로 몰아 넣는 이런 일이 왜 일어난 것일까?
이 본문은 리브가나 야곱의 됨됨이에 초점을 맞추는 윤리적, 도덕적, 합리적 관점으로 이해하기는 어렵다. 이 본문은 윤리적, 도덕적, 사회적 합리적인 관점이 아니라, 이 땅에 믿음의 가문을 만들어 가시려는 하나님의 강권하시는 개입이라는 관점에서만 이해할 수 있다. 오늘 말씀을 이해하는 열쇠는 창 25:23절에 기록되어 있다. 에서와 야곱의 천부적인 권리를 바꾸신다고 하신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시고, 이 말씀을 받은 사람은 리브가이다.
그래서 자신의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 말씀을 기억하고 있는 리브가에게 일을 행하도록 개입하신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것은 리브가의 믿음 여부가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선택이고, 개입이시다. 왜냐하면 리브가의 믿음 여부는 성경에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택하신 야곱도 두려워하면서 이 일에 떠 밀려 들어가서 그런 일을 한 것이다. 물론 야곱은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욕심을 품기도 했을 것이다.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사회의 통념적인 관습을 따라 진행하려는 장자의 권리에 대해,
사회 구조상 약자이나 하나님의 뜻을 품은 이들이 할 수 있는 그들만의 수단이자 방법을 쓴 것이고,
그것마저도 하나님의 강권하시는 손길이 느껴지는 것이 본문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본문을 읽을 때,
우리가 할 질문은 야곱과 리브가의 도덕성이 아니라,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일을 만드셨는가 하는 것이다.
해석해 볼 수 있는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에서보다 야곱이 믿음의 대를 이어가기에 적합하다고 여기셨다는 것이다.
아내를 구하는 장면이나, 장자권에 대한 태도에 대한 에서에 대한 기록을 보면 어렴풋이 그 이유는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가 빼앗는다"고..,
침노는 전쟁 용어이고, 빼앗는다는 말도 썩 유쾌한 용어는 아니다.
그러나 이런 용어를 사용하신 이유는
하나님에 관한 것들 - 구원, 축복, 은총 등 -은 싸워서라도 얻어야하는 것들임을 강조하신 것이리라.
야곱은 많은 것을 잃을지라도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삶을 위해 싸울 줄 아는 존재였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 본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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