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C 140 – 76
이스라엘 땅 이야기
요한 힐카누스
요한 힐카누스B.C 134-104는
그의 아버지 시몬이 지녔던 대제사장직과 군주의 지위를 계승했다.
그는 안티오커스 7세의 압박을 받았으나,
셀류커스 왕조가 내분으로 힘을 잃게 되자, 주변국을 점령하면서 영토를 넓혔다.
알렉산더의 영향으로 세워진 헬라주의 국가들이 힘을 잃고 있었고,
아직 로마의 힘이 분명하게 미치지 못했던 정치 세력의 공백기에
요한 힐카누스는 598년부터 분리된 남쪽 지역의 이두매를 병합시킨후 유대교로 개종시켰다.
요한 힐카누스가 이두매를 정복하고 책임자로 세운 이가 헤롯의 아버지 안티파터이다.
힐카누스는 사마리아와 세겜을 정복한후,
세겜에 세워졌던 그리심산 성전을 파괴했다.
요한 힐카누스 시대를 지나면서
하시딤으로서 마카비 왕조에 참여했던 이들 중에서 바리새파가 나오게 된다.
이들은 비제사장 계열의 평신도 무리에서 나온 신학적인 집단으로,
자기들끼리는 형제나 친구라는 의미인 ‘하베르’라고 불렀다.
이들의 행동과 신학의 중심은 율법이었고, 조상들이 전해준 전승이었다.
바리새파는 헬라적인 군주의 경향으로 기우는 하스몬 왕조와는 대립적인 관계에 있었다.
아리스토불로스와 알렉산더 얀네우스
힐카누스의 아들 아리스토불로스B.C 104-103는
아버지의 계승자인 어머니를 굶겨 죽인 후 왕이 된 인물이다.
그는 짧은 통치 기간에 정복 전쟁을 펼쳐 갈릴리와 이두래 지역을 정복한 후 유대교로 개종시켰다.
아리스토불로스는 처음으로 왕이라는 칭호를 가졌다.
아리스토불로스가 죽자
그의 아내인 알렉산드라가 아리스토불로스의 동생인 알렉산더 안네우스과 결혼하고,
그에게 왕의 칭호를 주었다.
얀네우스도 정복 전쟁을 펼쳐
요르단 동부 지역과 서부 해안 평야지대를 정복하여 다윗-솔로몬 시대와 맞먹는 영토를 확장했다.
그러나 요르단 동부 지역의 지배자였던 나바테아인들과 전쟁을 계속해야 했다.
얀네우스는 바리새파와 사이가 좋지 못했고,
정복 전쟁 등으로 인해 민중 사이에도 인기가 없었다.
통치 기간에 일어난 민중 봉기에 바리새파들이 관련되었다고 보고,
바리새파 800명을 죽인 일도 있었다.
이 일로 얀네우스의 헬라적인 정책에 반대하던 많은 사람들이 디아스포라가 되었다.
주변 국가들
셀류커스 왕조의 안티오커스 7세B.C 138-128가
유다의 독립을 저지하기 위해 유다의 많은 도시를 점령한 후, 예루살렘을 포위했다.
그러나 그는 본국의 문제때문에 예루살렘 포위를 풀수 밖에 없었고,
욥바 등에 대해 조공을 받기로 하고, 병기도 빼앗은 후, 포로를 잡은 후 물러 갔다.
그후 안티오커스 7세는 파르디아와 전쟁에서 죽었는데,
그의 후계 문제를 두고 데메트리오 2세와 안티오커스의 동생 사이에 내란이 일어났다.
결국 데케트리오 2세가 통치자가 되었지만,
이후로 셀류커스 왕조는 내란으로 빠져 들게 되었고,
안티오커스 7세의 죽음 이후 더 이상 유다를 압박하지 못했다.
얀네우스의 활발한 정복 전쟁은 필연 주변국들과의 전쟁을 가져 오게 되었다.
그 중 하나는 프톨레이(악고)를 공격했다가 지배자인 구브로의 통치자 라디우스에게 패했다.
그러나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가 라디우스를 물러나게 함으로 살아날 수 있었다.
한편 요단 동편 땅을 정복하는 과정에서는
얄묵강 상류인 욜란에서 나바테아의 왕 오보닷과 전쟁을 하게 되었는데,
얀네우스가 매복에 걸려 죽게 되었으나 가까스로 목숨만 건지는 일도 있었다.
세겜을 정복하는 과정에서는 사마리아인들의 도움 요청을 받고 온
셀류커스 왕조의 데메트리오 3세와 전쟁을 하면서 위기를 넘기기도 했고,
셀류커스 왕조와 나바테아인들의 전쟁에 휘말려 들기도 하는 등,
알렉산더 얀네우스는 통치 기간 동안 크고 작은 수많은 전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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