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이야기 주제중 하나는
문명세계로부터 광야세계로 이끄시는 하나님입니다.
고대 문명 중 하나인 바벨론 문명에 살던 아브람을
광야로 상징되는 가나안으로 부르셨고,
나일강 문명에 젖어 살던 이스라엘 자손들을 시내광야로 이끄셨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은 범죄한 인간들은
광야가 아니라 문명세계로 보내셨습니다.
이것이 바벨론 포로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이 되는 출애굽 이야기도 나일강의 풍요로 만들어진 이집트 문명에서 살던 이스라엘 자손들이이집트 문명을 떠나 광야로 들어서는 장면을 들려 줍니다.
출애굽이라는 여정이 성경이 말하는 것처럼그렇게 일사천리로 진행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오늘 말씀인 출 14장에 보면출애굽이라는 역사적인 사건의 흥분이 채 가시기도 전에"애굽으로 돌아가자"는 구호가 나오는 것을 봅니다.이 구호에서 추측할 수 있는 것은모세의 인도로 시작된 출애굽에 사건에 믿음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동참한 이들도 있겠지만, 많은 경우 그동안 길들여졌던 문명의 삶에 미련을 가진 이들도 많았다는 것입니다.
문명 세계에 익숙해진 이들은 출애굽이라는 그 장엄한 광경에 압도되어 문명 세계를 떠나기는 했지만,기회만 주어지면 그곳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은 놓지 않았습니다.출애굽기와 민수기를 읽어보면 이 구호는 계속 반복됩니다.그만큼 사람은 길들여진 문명세계를 벗어나기 힘든 존재입니다.
출애굽은 이러한 문명형 인간들을 끄집어 내어광야형 인간으로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의 진정한 출애굽이야기인 셈입니다. 그러므로 출애굽이란지리, 역사적인 의미인 이집트를 벗어나는 것만이 아니라,문명에 길들여져 버린 존재 양식의 변화를 향한 여정을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문명 세계의 특징은 하나님을 상대화하는 것입니다.
상대화라 함은 하나님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는 것을 말합니다.
즉 믿음의 생활 영역을 종교 영역으로 축소하는 것입니다.
종교 외의 영역은 하나님의 영역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만듭니다.
심지어 종교 영역 마저도 하나님이 상대화되는 일은 계속됩니다.
상대화를 이해하기 쉽게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가나한 자는 사회 최하위 계층으로 소모품으로 여겨지던 사람들입니다.
자유, 소유, 권리 등 가장 기본적인 인간됨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이 하나님 나라를 소유한다고 하셨지요.
너무 과격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규모가 커진 교회가 되었을 때,
즉 교회 안에 가난한 자들뿐 아니라, 부자들이 들어오게 되었을 때,
마태는 이 말씀을 이렇게 해석해서 가르쳤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로 말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처음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가
부자들이 부를 버리지 않고도 교회에 참여할 수 있도록 상대화된 것입니다.
자본주의 속에서 경제가 성장하는 문명 툴에 속했던
한국교회는 이 말씀을 아주 다르게 해석하여 상대화했습니다.
'가난한 자가 복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삼중의 축복을 받아 많이 소유하는 것이 복이 있는 자라고 말입니다.
자본주의의 문명 세계에 맞게 상대화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또는 예수님의 말씀이 상대화되는 데에는
물론 합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복음의 확장이라는 종교적인 이유와
종교인도 사회의 일원이라는 사회적인 이유에다가
종교인도 누릴 것은 누릴 수 있다는 경제주의 이유까지 이유는 끝도 없습니다.
이렇듯이 문명 세계에서는
하나님과 종교의 영역이 끊임없이 상대화됩니다.
물론 긍정적인 상대화도 있겠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 또는 예수님의 말씀이 상대화되어 갈수록
그곳에 있는 교회와 신앙인의 영적 존재는 점점 무력해지고,
비참해진다는 것입니다.
교회와 신앙이 지니는 특별함이 사라지는 것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문명세계에 길들여지는 자신의 백성들을
끊임없이 광야로 불러 내셨습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하나님 한분만을 절대 의존하는 법,
하나님의 절대화하는 삶을 연단하신 것입니다.
출애굽의 이야기도
이집트라는 문명 세계에서 하나님을 상대화하다 못해
하나님의 존재를 잊어버리기까지 한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다시 하나님의 사람들로 만드시는 하나님의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 하나님을 섬긴 백성인
유다인들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인 토라, 모세 오경에 대한 태도가 다양했음을 알수 있습니다.
정치와 타협하면서도 토라를 따른다고 여긴 제사장 그룹들,
사회 속에서 토라뿐 아니라 구전 율법도 실행해 보려던 바리새인들,
사회를 떠나 광야에서 실현해보려는 엣세네파들,
과격한 정치 혁명으로 이를 실현해 보려던 열심당원들,
소리없이 삶을 견뎌내며 살아가려던 이들...,
즉 성경과 역사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상대화하려는 문명 세계에 대항하여
하나님을 절대화하면서 믿음으로 살아보려고 몸부리친 이들과
문명 세계 속에 순응하여 하나님을 상대화한 이들이 존재했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상대화 또는 절대화하는 다양한 그룹이 있지요.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을 절대화하면서 고립되어 사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사회속에서 중간자의 입장을 취하며 사는 이들도 있고,종교적인 교리를 사회적인 입장에서 적용하려는 이들도 있고,종교와 생활을 분리하며 사는 이들,우리 사회 속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실로 다양한 반응들이 존재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그룹에 속하고 싶은 신앙인인가요?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길에 하나의 정도는 없는듯 합니다.그렇다고 원칙이 없는 것은 아니겠지요.
앞 길을 가로막고 있는 홍해 바다와 추격하는 문명 세계의 세력 사이에서 반응하는 이스라엘 자손들과모세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우리의 갈 길를 택할 수 있을 듯합니다.
어찌보면 문명 세계에서 광야형으로 살아내는 비결이오늘 우리 시대 신앙인의 영성이 되어야만 하리라고 봅니다.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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