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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묵상

삶에 파장을 일으키실때...(창 22장)

창 22장

 

1. 평화로운 아브라함

아브라함은 이제 130여세(추측)가 된 노년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그는 75살에 하나님(여호와)의 부름을 따라 나섰지요. 그리고 그로부터 25년후인 100살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아들 이삭을 얻게 됩니다. 성경에 기록된 아브라함의 중요한 이야기들은 대부분 이 시기, 75살에서 100살까지의 시기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름을 따라 나선 나그네 여정의 치열한 삶을 살았던 아브라함은 100살에 이삭을 얻은 후에는 좀 여유로워 보입니다. 아들 이삭이 성장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와 그 후손에게 하셨던 약속을 믿고 하나님을 따르는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시험거리도 걱정거리도  없었겠지요. 평생 불임으로 살던 아내 사라도 90살에 얻은 아들 이삭을 아끼며, 잘 양육하면서 행복한 시절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2. 삶에 파장을 일으키시는 하나님

그러던 어느날 이삭이 짐을 질수 있고, 먼 여행길에 나설 수 있을만한 나이인 20-30대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가정에 큰 파장을 일으키는 요구를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나그네 삶을 끝내고 평화로운 삶을 사는 아브라함에게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요구를 하신 것입니다. "네 아들 이삭을 번제로 내게 바쳐라!'

하나님께서 인신번제를 요구하실리가 없지요. 그러니 이 요구는 하나님의 본성에도 맞지 않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주신 약속에도 맞지 않고, 크게 번성할 것을 약속 받은 후손의 첫 시작인 이삭에게도 맞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찌되었던 하나님이 주신 은총인 아들 이삭이 잘 자라는 것을 보는 낙으로 살던 아브라함-사라의 가정에 감당하기 힘든 고난이 닥친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문제는 이 일을 일으키신 이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이런 일을 하실까요?


 

3.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요구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 첫 번째는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내가 일러주는 한 산으로 가라"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75살때 부르셨던 것처럼, 이제 아브라함과 아들 이삭을 함께 부르셔서 일러 주시는 땅으로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네 사랑하는 아들 이삭과 함께 믿음의길, 순례의 길을 떠나라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곳에서 네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려라"고 하셨습니다. 이 요구에 대한 하나님의 깊으신 섭리를 우리가 다 헤아릴수는 없지만, 그래도 한 가지 추측해 보는 것은 "부름 받고 나선 믿음의 여정에서 얻은 최고의 은총, 공로물을 다시 내려 놓아라"는 것입니다. 약 50여년간 하나님을 따라 믿음으로 산 결과로 얻은 아들, 은총으로 받은 최고의 선물을 다시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은총, 아브라함 믿음의 최고의 공로물을 포기하라는 것입니다.


 

4. 아브라함이 행한 것

아브라함이 아내 사라에게 하나님이 하신 요구를 말했을까요? 성경은 아무런 것도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가 아들 이삭에게도 하나님의 요구를 말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말하지 않았을 것으로 봅니다. 아브라함은 이 이상한 요구의 의미를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요구에 아브라함은 필요한 짐을 챙겨서, 아들 이삭과 도와줄 두 명의 종과 함께 하나님이 일러 주신 곳으로 떠났습니다. 아브라함이 살던 브엘세바에서 모리아산(예루살렘)까지는 약 75km정도 됩니다. 3일간을 걸어가야 하는 길입니다. 아들 이삭과 함께 3일 길을 걸어 가면서 그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약 50여년 전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나섰던 때를 생각했을까요? 부모 친척 고향을 다버리고 떠나 하나님만 의지하고 살면서, 가는 곳마다 제단을 쌓고 간절하게 하나님을 찾았던 초심을 떠올렸을까요? 아브라함이 아들과 함께 떠난 3일 간의 여정이 그동안 익숙해져서 하나님의 은총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던, 아니면 더 이상 은총을 고대하지 않는 무기력진 그의 신앙심을 다시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을까요? 

아들 이삭을 포기하라는, 아들을 버리라는 하나님의 요구를 따라 가는 길에서 그는 아마도 다시 하나님을 간절히 찾아야만 했을 것입니다. 이 일을 두고 고민하지 않고, 하나님을 찾지 않을 아버지는 없습니다. 삼일 내내 기도했을 것이고, 이 요구의 의미를 묵상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큰 선물이자 만족의 표시인 아들을 두고 치고 들어 오시는 하나님의 요구는  어찌보면 잠자고 있던 아브라함의 믿음을 다시 일깨우는하나님의 도발인 셈입니다.

삼일 길을 걸어 간 끝에 아들 이삭이 묻습니다.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습니까?". 삼일 길의 묵상을 통해 무언가를 깨달은 아브라함이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실 것이다." 이 목소리에서는 아브라함이 깨달은 새로운 영성이 느껴집니다. 하나님의 선물인 아들을 의지하고 만족하던 신앙에서 그를 버리고 하나님 앞에 홀로서기를 시작한 것입니다.


5. 오랫만에 쌓은 제단

하나님이 일러 주신 곳에 도착한 아브라함은 지체하지 않고 제단을 쌓았습니다. 이 제단은 그가 참으로 오랫만에 쌓은 제단입니다. 그는 아들과 함께 스스로 돌을 모아 제단을 쌓았고, 그 위에 번제물을 불태울 나무를 놓았습니다. 그리고 아들 이삭을 줄로 묶어 번제물로 올렸습니다. 번제로 드린 것이지요. 이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다시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였기 때문입이다.이 일을 보신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아마도 아들 이삭을 얻고 난 다음 익숙해진 은총을 누리면서 하나님을 찾는 삶이 느슨해졌던 모양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평화로운 삶에 파장을 일으키신 것은 아브라함의 신앙을 다시 일깨우는 동시에, 아들 이삭에게도 믿음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시려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비록 하나님의 도발이 만든  여정이었지만, 아들 이삭과 함께 3일 간의 순례길을 떠나 제단을 함께 쌓는 그 모습에서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영성을 보게 됩니다.


6. 초심을 일깨울 도발, 코로나 사태

신앙에서 가장 큰 장애물은 익숙함입니다. 은총을 받은 아브라함도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을 향한 기도의 익숙함, 예배의 익숙함, 말씀의 익숙함, 심지어 은총에 대한 익숙함은 언제나 신앙을 멈추게 하고 퇴보시키는 장애물이 됩니다.

신앙에서 또 하나의 장애물은 소유로 만족하는 것입니다. 그 소유가 물질이든, 하나님께 받은 은총이든, 하나님께 받은 평화이든, 그것에 만족하기 시작할 때, 신앙은 생명력을 상실합니다.

영성의 익숙함과 만족감은 이 시대 신앙인들과 교회의 상징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신앙이 시대의 문화가 되어가고, 신앙이 소유를 쌓아가는 도구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인 이삭으로 만족하고 있던 아브라함처럼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다시 일깨우시려고 창 22장의 파장을 일으키신 것처럼, 코로나 전염병 사태 또한 이 시대의 영성을 다시 일깨우는 하나님의 파장으로 이해하면 좋겠습니다. 적어도 우리 신앙인들은 익숙함으로 나른해진 우리의 신앙, 은총을 주시는 하나님보다 은총 그 자체로 만족하는 소유 중심의 이 시대 신앙인과 교회를 다시 일깨우는 사건으로 묵상했으면 합니다.


하나님이 일으키신 파장으로 인해 아브라함이 3일 간의 여정을 떠났듯이,

코로나 사태로 인해 교회 모임이 폐쇄되는 이 기간을 하나님의 뜻과 초심을 회복하는 묵상 기간으로 삼았으면 합니다. 

아브라함이 3일 간이 여정 끝에 집착했던 아들 이삭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100% 믿었듯이, 코로나 사태를 지나면서 영성 회복을 위한 간헐적 단식과도 같은 내려 놓음과 포기가 많아졌으면 합니다.

아브라함이 참으로 오랬만에 제단을 쌓았듯이, 코로나 사태를 지나면서 하나님을 다시 찾아가는 예배와 말씀과 기도 회복하기 운동이 일어나기를 기도합니다.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