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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따라 배우는 성경 (맥잡기)/성경지리역사

B.C 75 – 63 / 하스모니안 시대 독립 시대

B.C 75 – 63

 

이스라엘 땅

 

살로메 알렉산드라 

알렉산드라B.C 76-67

아리스토불루스 1세의 아내였다가 알렉산더 얀네우스와 재혼했고,

그가 죽은후 왕위를 이어받은 특별한 이력을 지닌 여왕이다. 

알렉산드라는 장남인 힐카누스 2세를 대제사장으로 임명한후

자신이 왕이 되었고,

바리새파와 대립했던 남편 안네우스와 다르게 바리새인들을 중요하면서 평화로운 통치를 했다.

알렉산드라가 통치하던 짧은 시기

바리새인들은 백성들에게 그들의 종교법을 지키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알렉산드라의 차남 아리스토불로스 2세는 끊임없이 왕위를 노리고 있었는데,

알렉산드라가 죽후 왕위를 두고 형제간 내전이 일어났다. 

장남 힐카누스가 왕위를 이었지만,

동생 아리스토불로스 2세B.C 67-63의 위협에 왕위와 대제사장직을 양보해야만 했다.  

 

그러나 요한 힐카누스

이두매 지역의 책임자였던 안티파스(헤롯의 아버지)의 도움으로 반격을 할 수 있었지만,

그들의 내전이 결판나기 전에 로마 세력의 개입으로 하스모니안 왕조가 끝장났다. 

내전으로 대립하고 있던 아리스토불루스 2세와 힐카누스 2세는

수리아를 정복한 폼페이누스에게 서로 지지해 달라고 부탁을 했으나,

폼페이우스가 나바테아인들과의 전쟁 문제를 결정을 미루고 있었다.

이때 아리스토불로스 2세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자신의 군대를 모으자,

폼페이우스가 예루살렘으로 진격하여 예루살렘을 점령함으로 하스모니안 왕조도 끝나게 되었다. 

폼페이우스

아리스토불로스 2세와 아들들을 포로로 잡아 로마로 끌고 갔고(장남 알렉산더는 탈출함),

힐카누스 2세에게 대제사장과 왕이 되도록 하여 유대 땅의 실절적인 통치자가 되게 했다.B.C 63–57

이제 유대 땅은 로마 제국의 수리아 총독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B.C 57년 부터는 힐카누스의 왕의 직함을 빼앗고, 대제사장직, 즉 종교적인 기능만 허락하였다. 

그 이후 로마령이 된 유대 땅의 통치권을 두고,

요한 힐카누스 2세와 포로에서 돌아온 아리스토불로스 2세의 가문과

새롭게 등장한 헤롯 가문 사이에 치열한 싸움이 일어났다.

결과는 아는 대로 헤롯 가문이 통치권을 쥐게 된다.   

 

 

주변국가

 

셀레우코스 왕조의 멸망

이 당시 셀류커스 왕조의 영토는 현재의 수리아 정도로 축소되었는데,

이것은 전성기 영토의 1/20으로 축소된 것이다.

그 이후 셀레우코스 왕조는 몇십 년 동안 존재할 수 있었는데,

이유는 주변의 강대국이 셀류커스 왕조를 완충 지대로 삼았기 때문이다.

파르티아는 동쪽의 유목민들과 싸우는 한편 넓은 제국의 체계를 다지느라 여념이 없었고,

로마는 한창 폰투스(본도)와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다른 헬락 제국이었던 이집트의 프톨레미 왕조는

사실상 로마의 지배를 받는 상태였고,

셀류커스 왕조와 마찬가지로  권력 투쟁을 벌이는 상황이었다.

셀류커스 왕국을 동북쪽을 차지하고 있던 아르메니아의 티그라네스 2세B.C 95-45

셀류커스 왕가의 경쟁자들 중 하나가 원조를 요청한 틈을 타서

잠시 동안 셀류커스 왕조를 지배하기도 했다.

B.C 70년대를 지나면서

로마의 루쿨루스가 폰투스(본도)의 미트리다테스 6세를 정복했고,

이어 아르메이나의  티그라네스 2세를 정복하면서

이 지역의 로마의 지배에 들어가게 된다.

결국 B.C 63년 수리아는 로마의 폼페이우스에게 정복당하면서

250여년간 이어져오던 셀류커스 왕조가 막을 내리게 된다.

 

나바테아 왕국

셀류커스 왕조와 로마가 수리아와 팔레스틴 지역을 지배할 때,

동쪽 지역은 기원전 4세기에 시작된 유목민 국가인 나바테아 왕국의

하리타드 3세B.C 87-67가 주변 지역을 통일하면서 셀류커스와 로마에 맞서는 강한 제국을 만들었다.

나바테아 왕국은 요르단 동부 지역과 미디안 지역을 지배했고,

한때 다메섹도 지배한 나라로 셀류커스 왕조를 물리쳤고,

로마제국과도 맞선 국가이다.

이들은 하스모니안 왕조와도 전쟁을 했던 민족으로 페트라 문명을 역사에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