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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따라 배우는 성경 (맥잡기)/역사지리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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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160- 140년대 / 마카비 혁명과 독립 시대 B.C 160- 140년대 마카비 항쟁 모데인이라는 마을에 할례 금지령을 확인하고, 우상 제물로 제사를 강요하려는 셀류커스 왕조의 관리들이 왔을 때, 마타디아스라는 인물이 그들을 죽임으로서 셀류커스 왕조의 박해를 향한 마카비 항쟁이 시작되었다. 이들의 항쟁이 알려지면서 하시딤들이 몰려왔고, 마타디아스의 아들 유다가 지휘관이 되면서 본격적인 저항 혁명이 시작되었다. 유다를 지휘관으로 항쟁하던 이들은 결국 예루살렘을 점령했고(아크라는 제외), 예루살렘 성전을 수복했고 성전 제의도 다시 시작했다.B.C 168 이 날을 기념하는 날이 하누카로(성전수복일)이다. 이로서 유대인들의 종교자유가 회복되었다. 마카비 혁명군은 지휘관 유다의 죽음에도B.C 161 불구하고 여기 멈추지 않고, 동생 요나단을 중심으로 계속 저..
B.C 200-160년 / 셀류커스 왕조 시대 B.C 200-160년 유대 사회의 변화 지배자가 셀류커스 왕조로 바뀌면서 유대 사회는 대제사장을 바뀌었는데, 그 이유는 토비아스 가문이 셀류커스 왕조를 지지하면서 왕으로부터 대제사장에 임명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대제사장직의 교체는 유대사회에 큰 문제를 불러 일으키게 된다. 셀류커스 왕에 의해 대제사장이 임명이 되면서, 오니아스 3세(야손)이라는 이가 왕에게 엄청난 돈을 주기로 하고 다시 대제사장직을 사오게 된다.B.C 175 그리고 그는 대제사장직에 올라 유대 사회에 급격한 헬라화 운동을 펼쳤다. 그러나 3년후에 다른 사람 메넬라우스가 더 많은 돈을 주기로 하면서B.C 172 야손은 대제사장직을 메넬라우스에게 뺏기로 요르단 동편으로 도망해야만 했다. 대제사장직이 사독 계열의 계승직에서 매매가 가능한 ..
B.C 302-200년 / 헬라 제국 통치(프톨레미-이집트 왕조 시대) B.C 302-200년 유대인들의 상황 프톨레미 왕조 시절에 유대인들의 상황에 대한 기록도 거의 없는 편이다. 다만 이 시기에 유대 땅은 부유하고 안정된 프톨레마 왕조의 일원이 되어 평화로운 1세기를 보낼 수 있게 되었다. 프톨레미 왕조에서 파견한 총독 행정관이 정치와 군사 행정을 담당한 반면에, 유대인들이 중요시 여기는 성전 제의와 율법을 중심으로 하는 생활은 대제사장과 유대 평의회(게르시아)를 중심으로 일종의 자치를 누리던 시기였다. 프톨레미 왕조가 유대 땅을 다스리던 당시 유대 사회의 실질적인 영향력을 발휘한 대제사장은 다음과 같다. 이 당시 유대인의 제사장 총수는 1500명 정도 되었다고 한다. 대제사장 히스기야는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애굽으로 이주했고, 그를 이어서 엘르아살이 대제사장으로 있..
B.C 330-300년/ 귀환공동체 시대(헬라 제국 시대) B.C 330-300년 알렉산더(헬라) 시대 마케도냐를 통일한 알렉산더 페르시아 제국을 정복하면서 유대땅에서는 전쟁 한번 없이 통치권이 알렉산더 제국으로 넘어 갔다. 알렉산더는 수리아를 정복한 다음 지중해 동부 해안을 따라 저항하는 두로와 가자와 사마리아 등을 정복하면서 이집트로 갔는데, 이집트는 알렉산더를 해방자로 여기고 바로로 추대하였다. 이 과정에서 알렉산더 군대가 예루살렘으로 들어 오지는 않은 듯하고, 대신 예루살렘의 대제사장 대표단이 가자를 공격하는 알렉산더를 만나 복종을 표시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그후 사마리아가 알렉산더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고, 알렉산더는 페르시아를 공격하러 가는 길에 파르메니오에게 사마리아를 치게 해서 사마리아는 정복을 당했다. 이때에도 알렉산더 군대가 예루살렘을 공격하..
B.C 500-330년 / 포로 귀환공동체(페르시아) 페르시아 제국 고레스에 의해 시작된 페르시아 제국은 바벨론과는 다르게 그들이 정복하고 또 물려받은 각 지역의 종교와 문화를 파괴하지 않았고, 오히려 장려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정책 결과로 바벨론에 의해 포로로 끌려갔던 유대인들과 빼앗겼던 성전 기물이 예루살렘으로 돌아 올 수 있었다. 또한 페르시아 제국은 구약성경 마지막 시대인 유다와 예루살렘 멸망 이후 시대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 구약성경의 마지막 역사서인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가 페르시아 제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학개, 스가랴가 역시 페르시아 제국에 재건된 성전과 관련되어 있다. 성경에 아하수에르로 기록된 크세르크세스 1세는B.C 485-464 에스더를 왕비로 맞은 왕이다. 또한 유다인을 멸절하려는 아각 사람 하만의 음모에서 구원된 것..
B.C 580-500년, 유대 포로시절, 페르시아 시대 바벨론 침공 바벨론 왕 나보폴라살이B.C 625-605 새로운 강자로 등장하여 앗수르를 정복했고B.C 605, 아들인 느부갓네살은 왕이 되어 정복 원정에 나서 유다를 정복했고, 속국으로 만들어 조공을 받았다. 그후 유다가 바벨론을 배반하고 애굽을 의지하자, 다시 와서 예루살렘을 완전히 멸망시켰다.B.C 586 B.C 580-500년 남왕국 유다의 멸망 요시아 다음 왕이 된 여호아하스와 여호야김, 시드기야는 모두 요시아의 아들이고, 여호야긴만 그의 손자이다. 이들은 때로는 애굽을 의지하였고, 때로는 바벨론을 의지하는 정책을 쓰면서 명맥을 유지하다가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에게 멸망당했다.B.C 586 이로써 출애굽 공동체의 명맥과 다윗 왕조의 정통성을 이어오던 하나님의 선민 이스라엘의 마지막 나라인 유다마저 역..
720-580년 / 남왕국 유다의 멸망(바벨론시대) B.C 720-580년 1. 남왕국 유다의 히스기야 남왕국 유다는 선한 왕이었던 웃시야(아사랴)와 요담의 긴 통치 이후, 아하스라는B.C 732 악한 왕에 의해 온 나라에 우상의 제단이 세워지고, 앗수르에게 조공을 바치는 상태였다. 아하스는 탁월한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여호와 대신에 앗수르를 의지하는 정책을 펼쳤고, 우상 제단을 예루살렘 성전에까지 세우는 악행을 행했다. 아하스를 이어 왕이 된 히스기야는B.C 716 다윗 왕조에서 가장 선한 왕으로 평가받은 왕으로 종교적인 개혁 운동을 펼쳤다. 그러나 그는 앗수르에 조공을 바치면서도 끝내 예루살렘을 지켜낸 왕이었다. B.C 701 유다 왕국이 앗수르에게 멸망당하지 않은 이유 중 앗수르의 왕궁에서 내분이 일어났고, 그로 인해 앗수르가 간섭할 ..
B.C 750-720년 / 북이스라엘 멸망(앗수르 시대) B.C 750-700년대 1. 북왕국, 이스라엘의 혼란 예수님 오시기 700여년 전, 출애굽 공동체의 한 축인 북왕국 이스라엘은 세력을 넓히고 있던 앗수르 제국에 의해 위협을 받고 있었다. 이런 외적인 위협뿐 아니라, 북왕국 이스라엘은 예후 왕조의 여로보암 2세의 전성기를 끝으로 통치 세력의 무능함으로 혼란기에 빠져들면서 위기를 겪게 되었다. 여로보암 2세의 아들 스가랴가 살룸에게 죽었고, 살룸은 한달 후 므나헴에게 죽었고, 므나헴은 아들 브가히야까지 12년을 다스렸지만, 베가에게 죽었다. 이스라엘의 왕이 된 베가는 앗수르의 위협에 맞서 아람왕 르신과 동맹을 맺는 등B.C 733, 이스라엘을 지키려고 했지만, 그도 약 10여년의 통치후 호세아에게 죽었다. 이스라엘의 마지막 왕 호세아는 앗수르와 애굽 양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