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성경 큐티 교재(필사&정리)/마태복음

마 13장 - 비유 말씀과 해석

비유 말씀은 구약에서는 마샬로 나오는데,

잠언, 격언, 수수께기 등 많은 용어로 사용된 마샬은 해설을 통한 가르침을 아니라,

통찰력을 얻도록 정신과 마음을 자극하는 용도로 사용되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비유도 동일한 목적과 의도를 지닌다.

 

비유는 위로부터 주어지는 일종의 계시로서

선택된 깨닫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로 구별하는 역할을 하는데,

선택된 자에게는 깨달을수 있는 통찰력이 주어지나, 그렇지 못한 이들에게는 비유의 의미가 숨겨진다.

 

비유를 통해 제시되는 천국의 비밀은 

미래의 새 예루살렘이나 황금길이라기보다는

예수님의 활동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현재의 하나님 나라를 의미하며,

이 하나님 나라를 깨닫고 참여하도록 촉구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 이 비유들이고,

예수님은 받아들이고 따르는 제자들에게는 그 의미를 풀어서 일러 주셨다.

 

비유의 말씀을 깨닫는 자들이 복된 존재라고 하셨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로 받아 들일 수 있는 눈과 귀를 가졌기 때문이다.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씨를 뿌리는 자 비유는 다른 비유와는 다르게 "천국은 이와 같으니.."라는 구절은 없으나,

이 구절을 가진 비유들과 같은 의도를 지닌 것으로 본다. 

 

이 비유는 오랜 역사를 두고 다양하게 해석되어져 왔다.

그러나 크게 씨와 밭에 초점을 맞추는 방식으로 해석되어져 왔다.

 

씨에 초점을 맞추면,

씨는 하나님의 말씀, 복음, 가르침 등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에 의해 씨가 뿌려진다는 것은

선교를 한다는 것이고, 복음을 가르친다는 것인데,

그 결과는 3/4이 만복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하는 실망적인 상황임을 보여 준다.

열심히 씨를 뿌리듯이 복음을 전하나, 결과가 그렇게 좋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매년 농부가 수확을 기대하고 씨를 뿌리듯이

복음전도자와 교회는 미미한 결과를 얻는 중에도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는 일을 해야 한다.

농부가 수확의 결과는 하늘에 맡기고 최선을 다하는 것처럼,

복음전도자와 교회도 그렇게 할 때, 

100배의 결실, 즉 자연적인 결실이 아니라, 하나님이 부어 주시는 은총의 결실을 만날 수 있다.

그러므로 씨(복음)를 뿌리는 일은 

이 세상 가운데서 복음의 열매를 맺게할 하나님의 은총을 깨달을 눈과 귀를 가진 이들을 찾는 일이다.

 

밭에 초점을 맞추어 해석하면,

곡식이 자라기에 적합한 밭이 있고, 그렇지 못한 밭도 있듯이,

하나님의 말씀(복음)이 자라기에도 적합하지 못한 존재도 있고, 더러는 좋은 마음을 가진 이들도 있다는 것이다.

이 때 밭은 교회일 수 있고, 성도들 개개인일 수 있고, 복음을 들어야 세상일수 있는데,

이들 모두는 이 비유를 듣는 순간 일종의 결단의 순간에 마주서게 된다.

"나는 어떤 밭 종류의 존재인가?"하고...

나는 말씀을, 복음을 듣고 깨달을 수 있는 존재인가?

아니면 다른 것들에 방해 때문에 그것을 깨달을 무엇을 가지지 못한 상태인가?

그러면 좋은 밭이 되려면 어찌해야하는가?

 

씨뿌리는 자 비유의 핵심은

씨(복음)을 듣고 깨닫는 자가 되라는 것이다.

이 깨달음은 인간의 지식이나 경험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깨달음의 은총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다.

이 은총은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 구세주로 믿고 참여하는 자들에게 주어진다. (요 14:25-26)

 


 

"깨닫는"에 사용된 헬라어 단어는

συνίημι; suniēmi,

2 person plural suniete, 3 person plural suniousin (Matt. 13:13 R G T; 2 Cor. 10:12 Rec., from the unused form sunieō), and suniasin (2 Cor. 10:12 L T Tr WH), and suniousin (Matt. 13:13 L Tr WH from the unused (suniō), subjunctive 3 person plural suniōsi (R G L T Tr in Mark 4:12 and Luke 8:10, from the unused sunieō or from suniēmi) and suniōsi (WH in Mark and Luke the passages cited, from the unused suniō), imperative 2 person plural suniete, infinitive sunienai, participle suniōn (Rom. 3:11 R G T from suieō), and suniōn (Rom. 3:11 L Tr WH, and often in the Septuagint, from suniō), and sunieis (Matt. 13:23 L T Tr WH; Eph. 5:17 R G; but quite erroneously suniōn, Griesbach in Matthew, the passage cited (Alford on Rom. 3:11; cf. WH’s Appendix, p. 167; Tdf. Proleg., p. 122); Winer’s Grammar, 81 (77f); Buttmann, 48 (42); Fritzsche on Rom. vol. i., p. 174f); future sunēsō (Rom. 15:21); 1 aorist sunēka; 2 aorist subjunctive sunēte, sunōsi, imperative 2 person plural sunete (Mark 7:14 L T Tr WH); (sun, and hiēmi to send);

 

1. properly, to set or bring together, in a hostile sense, of combatants, Homer, Iliad 1, 8; 7, 210.

2. to put (as it were) the perception with the thing perceived; to set or join together in the mind, i.e. to understand (so from Homer down; the Septuagint for bı̂n and his′kı̂l): with an accusative of the thing, Matt. 13:23,51; Luke 2:50; 18:34; 24:45; followed by hoti, Matt. 16:12; 17:13; followed by an indirect question, Eph. 5:17; epi tois artois, ‘on the loaves’ as the basis of their reasoning (see epi, B. 2 a. α.), Mark 6:52; where what is understood is evident from the preceding context, Matt. 13:19; 15:10; Mark 7:14; absolutely, Matt. 13:13-15; 15:10; Mark 4:12; 8:17,21; Luke 8:10; Acts 7:25; 28:26f; Rom. 15:21; 2 Cor. 10:12; ho suniōn or suniōn as a substantive, (Buttmann, 295 (253f); Winer’s Grammar, 109 (104)), the man of understanding, Hebraistically equivalent to a good and upright-man (as having knowledge of those things which pertain to salvation; see mōros): Rom. 3:11 (from Ps. 13:2 (Ps. 14:2)). (Synonym: see ginōskō, at the end.)*

 

(Accodrance 사전에서 가져옴)

 

 

샬롬!!.

 


 

두번째 묵상

 

마태복음 13장, 

마가복음 4장,

누가복음 8장에 모여있는

비유는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 

 

비유만을로 알려진 갈릴리 호수의 한 풍경


 

"추수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가라지 비유와 그물 비유는

세상 가운데서, 또는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서 

악한 자들은 구별될 것이고, 심판을 당할 것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특이한 점은 구별하는 것과 심판하는 때는 현재가 아니라, 종말의 때라는 것과

구별과 심판과 주체는 교회 구성원이나 누구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세상과 교회의 구성원은 그들과 함께,

그러나 다르게 살아갈 "자라갈" 뿐이다.

 


 

겨자씨와 누룩 비유는

성장하는 신앙 공동체(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있고,

동시에 처음 상태와 마지막 상태의 차이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신앙 공동체 가운데 이 모든 일을 이루어 가시는 보이지는 않으나, 

존재하시는 하나님의 활동하심에 대한 이야기로 볼 수 있다.

우리의 삶과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여전히 일하시는 하나님은

아주 작고 미미한 신앙공동체를 완전히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바꾸시는 분이다.

 


 

보화와 진주 비유는 

가장 귀한 하나님 나라와 구원을 위해 모든 것을 투자하라는 의미로도 볼 수 있고,

반면에 "찾는다"에 초점을 맞춘다면,  보화나 진주가 무엇인지에 대해 질문할 수도 있다.

보화와 진주가 내세에 얻을 무엇이 아니라,

이 땅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활동이고, 은총이고, 역사라면,

진주와 보화를 사는 비유는 우리의 온 존재를 드려 하나님의 일하심에 동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예수님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 나라를 깨닫는 순간,

삶의 모든 것을 것을 드려 그 일에 동참하고, 헌신하는 이야기로 받을 수도 있다.

 


 

새것과 옛것을 꺼내오는 서기관 비유(이야기)는

저자로 알려진 마태 자신의 이야기일 수 있는데,

그는 새것(기독교 신앙)을 앞에 내세움으로 예수님을 통해 시작된 기독교의 우위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마태는 옛것(구약성경의 신앙)도 무시하지 않는다.

마태는 새것인 기독교 신앙을 뒷밧침하는 내용을 옛것인 구약에서 많이 인용하였다.

마태는 옛것(구약)을 통해 새것(신약)을 가져오는 탁월한 서기관이었다.

이 이야기는 복음을 가르치는 교회의 교사들이

구약을 어떻게 이해하여 신약에 적용할 것인지에 대해 일러 주는 이야기이다.

 


 

"그들이 놀라되... 예수를 배척한지라."

마태는 비유 이야기를 마치면서

예수님께서 고향에 가셨으나, 고향 사람들로 배척받은 이야기를 배치했다.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을 배척하는 이야기도 비유 이야기와 같이

들을 귀와 보는 눈과 깨닫는 마음이 없는 이들이 당할 운명을 보여 준다고 볼 수 있다.

예수님께서 비유 이야기를 통해서 

깨달음을 얻을 은총을 자닌 하나님에 속한 자와 그렇지 못하여 심판받을 자들을 보여 주셨는데,

나사렛에 사는 고향 사람들은 

하나님의 현재 활동하심의 증거인 예수님이 하신 일을 알면서도 깨닫지는 못하고 배척함으로서

비유에서 보여진 바와 같이 

훗날 구별되고 버려질 존재들처럼 그들 스스로 하나님께 배척당할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