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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자의 성경해설서

별을 보십니까? 마 2:1~3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지금 사는 아파트에 이사 올 때 전에 살던 사람이 모든 것을 남김없이 다 가져갔지만 미처 떼어가지 못한 것이 한 가지 있는데 그것은 내 방 천정에 있는 별들이다. 아마 그곳이 아기 방이었을 것이다. 야광별이 백여 개 붙어 있어 불을 끄면 한 시간 정도 그 별들에서 빛이 난다. 그 별을 보면서 부모님의 아기 사랑이 대단하셨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마도 아기가 수많은 별을 보면서 별처럼 세상을 빛내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며 정성껏 천정에 별을 붙였을 것이다. 

 

요즘 ‘안녕들 하십니까’ 라는 말이 유행하는 것처럼 여러분에게 ‘요즘 별을 보십니까’라고 질문해본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누가복음 2:14)’라는 말씀 가운데 오신 아기 예수는 사실 사람들에게 어떤 평화도 주지 않았다. 아기 예수가 오심으로 어떤 상황의 변화도 없었고 오히려 아기예수가 오심으로 더 큰 혼란과 통곡의 사건들이 일어났다. 

 

아기 예수의 탄생은 당시 제도권을 흔들었고, 동방박사가 예루살렘에 와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고 말했더니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이 말을 듣고 소동이 일어났다. ‘소동하다’라는 말은 베데스다 못에 고침을 받기를 원하는 환자가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습니다(요한복음 5:7)’ 라고 할 때 물이 ‘소용돌이쳐 움직이다’와 같은 단어이다. 동방박사가 가져온 소식은 모든 사람들을 소란하게 하고 마치 개미집을 쑤셔놓은 듯 야단법석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런 혼란은 베들레헴과 주변의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두 살육하게 되는 사건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처럼 아기 예수의 오심은 우리에게 어떤 구체적인 평화를 주기 보다는 오히려 더 큰 혼란과 피신과 살육을 야기했다. 그렇기 때문에 베들레헴에 태어난 아기 예수가 평강의 주님이며 세상의 구주라고 믿기가 더 어려웠던 것이다. 에돔 사람인 헤롯은 신앙과 성서지식이 부족했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 헤롯을 보좌했던 유대지배층들은 결코 신앙과 성서지식이 부족하지 않았다. 헤롯이 통치하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더 신앙적으로 정통을 지키려 노력했던 사람들이었다. 헤롯은 모든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고 물었다. 당시 최고 종교 엘리트였던 대제사장들과 성서에 정통한 신학자들은 의심 없이 유대 베들레헴이라고 말했는데 그 근거는 구약성서의 미가서였다.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미가 5:2)’는 것이다.   

 

이처럼 그들은 정확한 신학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가졌던 성서 지식은 아기 예수를 평강의 왕으로 세상의 구주로 영접하거나 파생된 혼란과 살육을 막는데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고 부작용의 역할을 했다. 아기 예수를 구주로 알린 사람들은 오히려 먼 나라에서 온 동방박사들이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한때 IQ가 높은 신동에 대한 관심이 컸다. 예전에 세계 3위의 IQ를 가졌다고 알려졌던 김OO이 있었다. 만 3세에 미적분을 풀었고 이듬해 한양대 과학교육학과에 들어갔고, 만 8세에 홀로 미국유학을 가서 핵물리학을 전공했다. 나사에 있다가 평범하게 살고 싶어 몰래 한국에 들어와 충북대 토목학과에 입학했고 후에 평범한 교수가 되어 살고 있다. 당시 신동을 구별하는 가장 중요한 잣대는 IQ, 즉 지적 능력이었다. 요즘은 IQ 외에도 감성지수(EQ)도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다. 인간은 어렸을 때에 감성으로 세상과 모든 관계를 수립하고 난 후에야 지적능력이 중요하다고 알려지고 있다. 

 

왜 동방박사는 아기 예수를 경배하러 그 먼 길을 찾아왔지만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코앞에서 태어난 아기 예수를 경배하기는커녕 혼란과 살육을 가져왔을까? 그것은 한 쪽은 별을 보면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았다면, 다른 한 쪽은 성서를 보면서 신학적 지식을 갖고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고자 했다는 점이다. 그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하면 동방박사들은 ‘별을 본다’는 감성적 측면(EQ)에서 하나님을 찾는데 주력했다면 헤롯과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성서적 연구’라는 지적능력(IQ)을 가지고 하나님의 섭리를 파악하는데 주력했다고 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별을 보고서 찾아온 동방박사는 모든 역경을 이기고 아기 예수를 만나고 경배하고 돌아갔지만 별을 보지 않고 성서와 신학을 연구하고 지적 지식으로 하나님을 찾았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오히려 코앞의 아기 예수를 거부하고 태어난 아기들을 죽이는데 근거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동방박사는 비록 베들레헴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고 성서 지식도 많지 않았지만 별을 보면서 신의 뜻을 발견하려고 하였으며, 그 발견한 신의 뜻에 따라 그 먼 길을 왔다. 그렇다면 성서를 연구하는 것보다 별을 바라보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말인가.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성서 자체가 하나님이 아니기에, 다시 말하면 성서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발견해야하기에 성서문자 자체에 매달리다 보면 당시 제사장이나 서기관들처럼 성서는 잘 알지만 하나님의 뜻을 바로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는 말씀에서 그 답을 얻을 수 있다. 즉 땅은 하늘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하늘을 보지 않고 땅의 문제는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땅에 일어나는 모든 문제를 바르게 보고 그 해답을 얻기 위해서는 하늘을 바라보아야 한다. 다시 말하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뜻으로 이 땅의 모든 것들을 바라 볼 때 비로소 그 해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헤롯과 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들은 오직 땅의 문제를 자신들이 알고 있는 지식 안에서만 그 해답을 얻으려 했다면, 동방박사들은 하늘과 연관하여, 하늘을 바라보며,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뜻으로 땅을 바라보았다. 그것이 별이다. 

 

동방박사들은 땅을 구원할 구원자를 찾기 위해 땅을 보지 않고 하늘을 보았으며, 그 하늘에서 별을 발견하고 그 별의 인도가 하나님의 섭리임을 깨닫고 별을 따라 아기 예수를 찾아왔다. 

 

다시 ‘요즘 별을 보십니까’라고 질문해 본다. 우리는 성서를 보면서 그 안에 계신 하나님, 즉 별을 바라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때 성서는 단순한 지식이 아닌 예수의 참 모습을 발견할 수 있게 해 준다. 우리의 발은 땅을 딛고 있지만 우리의 눈은 저 하늘을 바라보면서 살아간다면 지금 여기서도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는 말씀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동방박사들과 같은 삶의 자세를 갖는 귀한 성탄이 되시기 바란다. 

 

 

미산 김춘기 설교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