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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큐티 교재(필사&정리)/출애굽기

출애굽기 2장 - 준비되는 출애굽 사람, 모세

근을 피하여 간 땅,

이집트에서 잘 살고 있던 이스라엘 민족에게 닥친 비극은 전제 정권의 억압 정책이었다.

늘어나는 이스라엘 인구를 두려워한 이집트의 바로는

이스라엘 여인들이 남자 아이를 출산할 때,

나일 강에 던져 죽이라는 상상도 못할 포고령을 내렸다.

하나님의 창조 섭리를 대적한 포악한 전제 정권은 무너지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생명을 존중하는 몇 명의 사람들에 의해

출애굽의 사람 모세가 태어났고, 성장했고, 연단을 받을 터전을 제공받았다.

출애굽기 2장은 

출애굽의 사람, 하나님의 사람인 모세가 태어나고, 성장하고, 연단받는 이야기 전체를 담고 있다.

 


 

세가 태어날 수 있었던 첫번째 조력자는

바로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남자 아이를 낳은 그의 어머니 요게벳이다.

그녀는 자신의 생명과 평안한 삶이 위협을 당함에도 불구하고,

즉 출산을 기피할 수만가지의 이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산파의 도움도 없이 남자아이를 낳았고,

남자 아이를 찾아 죽이려는 관원들의 감시를 피해 목숨을 걸고 그 아이를 3개월을 양육했다. 

어머니 요게벳의 이 용기가 없었다면, 모세는 없었다.

모세뿐 아니라, 요게벳이 낳은 아론도 역사에 등장하지 못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창조 섭리를 따르는 어머니들이 있기에 

역사에는 수많은 하나님의 사람들, 하나님이 사용하실 이들이 등장할 수 있었다.

 

요게벳이 아이를 더 이상 양육할 수 없었을 때,

그녀는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아이를 보호할 갈대 상자(방주)를 만들었고,

그것을 공주와 시녀들이 놀이터인 물가에 나올 시간에 맞추어 

갈대 상자에 넣은 아이를 두고 지켜보며,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을 것이다.

 

모세를 위해 두번째로 쓰임 받은 인물은 

아이러니하게도 아이를 죽이려는 전제 정권에 속한 바로의 공주였다.

그녀도 여자인지라, 갈대 상자 속에서 우는 아이를 보고 모성애가 발동되었을 것이고,

이스라엘 자녀임을 알았음에도 모세를 거두어 양자로 입적했다.

이 당시 이집트 왕실에서는 양자를 입적하는 일이 흔한 일이었다고 학자들이 말한다.

 

그리고 모세의 누이 미리암(10살도 안되었을)의 지혜와 용기로

아이의 어머니 요게벳은 아이를 돌려 받았고, 

삯(임금)을 받아 가면서 아이를 양육하는 기막힌 반전을 누리게 되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가면서

내려 놓을 때와 하나님의 도움을 기다릴 때를 아는 전형적인 삶이다.

 

요게벳은 양육이 끝난 모세를 

하나님이 쓰시는 다른 어머니인 바로의 공주에게 보냈고,

모세는 그곳에서 한 나라를 운영할 지혜와 경험을 배우게 된다.

모세가 바로의 왕궁에서 보낸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장성한 청년이 되었을때, 

모세는 잊지 않고 자기의 동족을 찾아 갔고, 그들이 당하는 고통을 마음에 새겼다.

그러다가 동족 이스라엘 사람을 박해하는 이집트 사람(감독?)을 죽인 일로

이집트 정권의 수배자가 되었고, 결국 이집트 땅을 떠나야만 했다.

모세가 서로 싸우고 있는 동족들을 말리다가,

그 중 한 사람이 모세를 고자질하는 바람에 그렇게 되었는데,

유대교 전승에서 이 때 싸운 사람은 다단과 아비람이었다고 전한다.

 


 

집트를 떠난 모세가 간 곳은

이집트의 통치 영역을 벗어난 땅,

6개의 유목민 부족 연합으로 형성된 미디안 땅이었다.

미디안 사람들은 정주하여 살아가는 이집트인들과는 다르게,

광활한 사막과 도시 주변을 자유롭게 오가면서 생활하는 광야의 유량민족이다.

그러니 이들의 땅이 어디라고 특정할 수는 없지만,

일반적으로 미디안 땅은 홍해의 아카반만 오른쪽과 위쪽 지역을 말하는 것으로 본다.

 

모세는 우물가에서 양을 치던 여인 십보라(이드로 가문)를 만나게 되는데,

(형 에서를 피해 밧단 아람으로 간 야곱이 우물가에서 양을 치던 라헬과 만나는 이야기와 같음)

이 여인이 속한 집안이 모세를 위해 쓰임이 되는 세번째 인물들이다.

 

모세는 십보라와 결혼해서 두 명의 아들을 낳았고,

광야인 미디안에서 양을 치는 유목민이 되어 여러 곳을 누비고 다녔을 것이다.

모세가 여호와 하나님께 소명을 받고 바로 앞에 섰을 때가 80살이었다고 하니

그가 광야에서 보낸 시간은 꽤 오래 되었을 것이다.

 (한편 그가 돌아 갈 때, 아이들을 할례한 것으로 보아 광야 생활이 길지 않았을 수도 있다.)

 

어쨋든 모세는 이집트 왕궁에서 나라를 통치하는 경험과 지혜를 얻었다면,

미디안 광야에서는 출애굽 한 후에 하나님이 백성들을 인도하실 광야,

즉 출애굽 루트를 미리 체험하고 답사하는 의미로서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또한 힘과 칼로 상대를 쳐서 굴복시켜야 살아가는 문화에서

지팡이(막대기) 하나에 의지하여 양을 치는 경험을 통하여 

출애굽 백성들을 이끌 영적인 자질을 체득하는 시기이었을 것이다.

 

이집트 왕자였던 모세가 미디안의 촌뜨기 목동으로 살아가고 모습이다.

 


 

그러는 사이 이집트의 정세가 변했다.

이스라엘 자손들을 억압하던 애굽 왕이 죽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상황은 바뀌지 않았고,

백성들은 여전히 고된 노동으로 신음하며 울부짖었고,

하나님은 그 신음소리르 들으시고,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기억하셨다고 전한다.

 

여기에서 죽었다고 하는 애굽 왕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만약 출애굽 후기설을 따른다면, 이 왕을 추측해 볼 수 있는데,

B.C 1290년 쯤에 왕조를 개설한 이집트 19왕조의 세토스 1세일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 이유는 19왕조는 힉소스 혈통을 이어 받은 왕조로서

출발할 때는 테베(룩소)를 수도로 하고 있었으나,

2대인 세토스 왕이 힉소스 족의 수도였던 아바리스(라암셋가 됨)를 재건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노동에 동원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세토스 왕이 죽고 아들 라암셋이 왕이 되었을 때도

아바리스 재건은 끝나지 않았기에, 백성들은 강제 노동에 동원되었을 것이다.

그러니 모세가 미디안 땅에 있을 때, 죽은 왕이 세토스 1세일 것으로 볼 수 있고,

모세가 돌아와서 대결한 왕이 라암셋 2세일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시기가 모세의 나이 80살과 맞지 않다는 점이다.

세토스 1세는 1291년-1279년까지 13년간 다스린 것으로 나오고 있기에,

이 시기에 모세가 태어났고, 왕궁에서 자랐고, 미디안으로 도망가서 산 것으로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세토스 1세의 아버지때 태어난 것으로 볼 수 있지만,

세토스의 아버지인 라암셋 1세는 19왕조를 개설한 인물로 3년간 통치했고,

그가 통치할 때 수도는 테베(룩소)였기에 출애굽기 1장과 어울리지 않는다.

 

모세의 나이와 조화시키는 문제는 있지만, 어쨋든 역사적인 상황은 이렇게 그추측해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