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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묵상/여호수아

구약의 복음(수 6:16-19)

여는 이야기

 

여호수아의 군대가 여리고를 정복한 이야기는 특이한 이야기입니다. 여리고의 인구가 얼마인지는 모르지만, 그 성에 사는 모든 사람이 죽임을 당했는데, 이스라엘 군대의 피해자는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성벽이 무너졌다 해도 안에 있던 군사들이 손발이 묶이지 않았다면 저항했을 터인데도 말입니다. 
게다가 여호수아는 아무런 작전도 세우지 않았습니다. 단지 여호아의 말씀하신 대로 순종만 했습니다. 그가 이 전쟁에서 한 일이라고는 제사장들의 법궤를 따라 돌다가 소리를 지르는 것이고, 성이 무너져 전의를 상실한 여리고 사람들을 죽인 일 밖에 없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미화되어도 전쟁에서 쌍방 피해는 필수적입니다. 현대전에 있어 기적적인 승리라고 불리는 이스라엘의 6일 전쟁도 이스라엘 전사자 800명, 부상자 4,000명이라는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물론 20,000명의 전사자를 낸 아랍연맹보다는 나아도 피해는 피해입니다. 아무리 일방적인 승리라해도 가만히 당하지 않는 것이 전쟁이라 피해없이 이길 수는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여리고 성 사람들이 손발이 묶인 것처럼 무방비로 당한 것처럼 기록되어 있는 여리고 성 정복 사건은 다른 좀 다른 관점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성경 이야기는 역사적인 사실을 그대로 쓰기 보다는,  그 사건에 나타나는 신앙적인 교훈을 줄 목적으로 기록한 것이 대부분입니다. 학자들은 이러한 관점을 신명기적인 관점이라고 합니다. 신명기적인 관점은 후세대의 신앙적 삶을 가르치기 위해 자신들의 역사를 하나님이 행하시는 섭리라는 틀에 넣는 것을 말합니다. 여호수아는 신명기적 관점으로 기록된 성경입니다.
여리고성 정복도 이러한 관점으로 볼 필요가 있는데, 신명기적인 관점으로 보면 제의적인 의미와 구원사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제의적인 의미

여리고 성을 정복한 이야기가 들려주는 제의적인 의미는 신명기 13장에 기록된 말씀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너는 마땅히 그 성읍 주민을 칼날로 죽이고 그 성읍과 그 가운데에 거주하는 모든 것과 그 가축을 칼날로 진멸하고 또 그 속에서 빼앗아 차지한 물건을 다 거리에 모아 놓고 그 성읍과 그 탈취물 전부를 불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 드릴지니 그 성읍은 영구히 폐허가 되어 다시는 건축되지 아니할 것이라. 너는 이 진멸할 물건을 조금도 네 손에 대지 말라.”
이 법이 우리 시대의 가치관으로는 잔인해 보이지만 하나님의 백성이 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이 가득했던 땅 가나안에서 살아 남을 수 있는 방법이었습니다. 이렇듯이 상대방을 모두 죽이는 전쟁을  ‘헤렘’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렇게 잔인한 전쟁을 하는 전쟁을 통해 성읍의 주인, 즉  통치하는 신이 바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쟁에서 승리한 사람들은 성읍의 사람들과 생축을 진멸해야 했고, 가옥등 소유물은 모두 불살라야 했고, 불사르지 못할 것들은 그들의 신께 바쳐야 했습니다. 이것이 고대와 성경에 나오는 전쟁법이었습니다.
 이런 헤렘 전쟁법에 따라 여리고는 여호와께 바쳐질 첫 열매이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성과는 다르게 모든 사람과 생축을 죽였고, 성읍을 불살랐으며, 태우지 못할 것들은 여호와께 바친 것입니다.
출애굽 사건때 여호와께서 이집트의 장자들은 죽었지만,  이스라엘의 장자들을 살려 주셨지요. 그때 살아난 장자들과 첫멸매는 자신의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즉 처음 태어나는 것과 처음으로 행하는 일을 하나님의 것으로 돌리는 것이 여호와의 법입니다.(민 8:16) 이런 점에서 여리고는 가나안 정복 사업의 첫열매로 하나님께 바쳐졌다는 제의적인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바쳐진 것은 사람이 취소하거나 사람이 사용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소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여리고 성을 정복한 다음에 사람이 살지 못할 곳으로 만들었습니다. 
“여호수아가 그 때에 맹세하게 하여 이르되 누구든지 일어나서 이 여리고 성을 건축하는 자는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 기초를 쌓을 때에 그의 맏아들을 잃을 것이요 그 문을 세울 때에 그의 막내아들을 잃으리라 하였더라.”
실제로 고대 여리고 성터는 지금까지도 사람이 살지 않는 고대의 유적으로만 남아 있습니다.

구원사적인 의미
그리고 여리고 정복 이야기에서 살펴 볼 또 하나의 특별한 것은 라합 일가가 살아 남은 구원사적인 의미입니다. 
이미 살펴본대로 여호와께 바쳐진 성읍에 사난 모든 사람은 죽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법이었습니다. 그러니 여리고에 살던 라합과 그의 가족도 모두 죽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라합과 그 가족들은 멸망의 도성에서 살아 남았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은 라합과 그 가족들을 살려 주심으로 스스로의 명하신 법을 허무셨습니다.  ‘헤렘”이라고 불리는 전쟁에서는 그 성에 사는 모든 생명을 진멸하라고 하셨는데, 라합과 그 일가를 살려 주심으로 스스로 자신의 법을 깨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자신의 법을 깨뜨리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은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는 사람은 살려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살리시기 위해서는 자신이 만든 법도 깨드리실 수 있는 분입니다.
본문에서도 이유가 나옵니다. “이는 라합이 여호수아가 보낸 사자들을 숨겼음이라.” 라합은 단순히 숨겨준 것만이 아니라, 여호수아 2장에 나오는대로 하나님을 선택한 사람입니다. 
라합은 자기가 사는 여리고와 가나안에도 신들로 불리는 존재들이 많지만, 여호와 하나님만이 상천하지의 유일하신 분이라는 고백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엄중한 말씀, 변개치 않으시는 성품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선택하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는 그 말씀들도 돌이키시는 분임을 라합 이야기를 통해 배우는데, 이것이 이 사건의 구원사적 의미입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보아도 이런 경우는 종종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패역한 소돔과 고모라에 사는 모든 이들을 멸하실 것이라고 스스로 선언하셨음에도,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멸망의 성 소돔에 살던 롯과 그 가족을 진멸당하는 중에 구해 주셨습니다.
자주 불평하며 모세를 대적하던 출애굽 백성들을 진멸하시겠다는 스스로의 맹세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람 모세가 간절히 기도하며 간구할 때, 그 뜻을 돌이키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실과를 먹는 날에는 죽을 것이라 하셨지만, 아담과 하와를 추방하시는 동시에 보살펴 주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죽이시는 분이 아니라, 살리시는 분임을 우리는 라합 이야기를 통해 알게 되는 것입니다.

구약의 복음 - 라합 이야기

 역사가들은 잔인한 진멸에만 초점을 두지만, 라합의 이야기는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람을 살려내시기 위해 자신의 뜻을 돌이키시는 하나님의 은총에 관심을 둡니다. 이것이 신명기적인 관점이며, 복음적인 관점입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복음을 보게 됩니다. 복음은 멸망 중에라도 사람을 살리시려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기어이 자신 마저도 내어주실 수 있는 분이심을 이 이야기는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리고 성이 진멸당하는 중에 구별되고 살아난 라합의 이야기는 구약이 보여주는 복음입니다. 
언젠가는 멸망 당할 세상에서도 예수님을 통해 행하신 일을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들이는 이들은 누구나 라합처럼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 기여하는 존재가 됩니다. 성경은 라합이 구세주이신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 갔다고 증언합니다. 
세상의 형편이 어떠하든 하나님을 아는 신앙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결코 멸망당할수 없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